<김명열칼럼> 추분

<김명열칼럼> 추분

이달 9월 23일은 음력 절기로,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추분이다.
백로와 한로 사이에 있는 16번째 절기다. 이때쯤의 시골의 농촌에서는 본격적인 가을걷이가 시작되고 한층더 바빠지는 계절이기도하다. 이때 가을추수를 하기 전 논뚝이나 밭뚝가에서 소풀을 뜯기면서 둑에 심어놓은 콩이나 밭에 심어놓은 콩을 베어다가 주인 몰래 콩서리를 해먹던 추억이 떠오른다. 개구쟁이 친구들과 어울려 콩을 몇 포기 뽑아오거나 낫으로 베어와 그 주변의 덤불이나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불을 피우고 콩깎지채 불위에 올려놓고 구어 먹던 생각이 난다.
입 언저리 주위가 새까맣게 묻도록 먹고 나면 포만감에 저녁을 거르고 하루밤 자고나면 콩을 너무 많이 먹어 설사를 하느라 공부시간에도 화장실을 뻔질나게 오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오랜 옛날에 지나간 아련한 아름다운 추억일 뿐이다.
가끔씩 일식집에 가면 메인 식사 전에 나오는 삶은 콩과 같은 이치이지만 남의 밭에서 몰래 훔쳐다 구워먹는 콩서리의 맛은 일식집에서 내놓는 삶은 콩보다 훨씬 몇배가 더 맛이 좋다. 엊그제까지 보이던 여름의 흔적이 슬그머니 사라지는 이때가 되면 나른한 가을햇살에 아지랑이처럼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콩서리를 해먹던 즐거웠던 추억들이 스믈스믈 떠오른다. 그래서 오늘은 먼저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옛 추억을 서두에 써서 올려보았다. 아마도 60대 이상의 나이가 들은 세대들은 시골에 살면서 이와 같은 재미있고 즐거웠던 농촌에서의 추억들을 한두개씩은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절기로 따져보면 백로 다음에는 춘분처럼 밤낮의 길이가 같은 추분이 온다. 금년의 추분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9월 23일이 된다. 하지때 지구가 북회귀선, 북위 23.5도까지 올라갔던 태양이 그후 부터는 차츰 차츰 남하하여 추분때는 적도위에 위치함으로써 다시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것이다. 이때부터 나날이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밤의 길이는 길어진다. 춘분때와는 정 반대현상을 나타낸다. 추분은 여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이고, 춘분은 겨울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추분때의 기온이 춘분때보다 평균적으로 약 10도정도가 높다. 천문학적으로 추분부터 동지 전날까지를 가을로 친다.
추분 무렵부터는 햇볕은 내려쪼이나 작열하지는 않아 뜨겁지 않고 따라서 더 이상 늦더위도 없다. 이때의 햇볕은 따갑지만 살갗을 태우지는 않는다. ‘가을볕에는 딸을 밭일하러 내보내고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낸다’는 속담은 이때의 뜨겁지 않은 태양, 따라서 피부를 그을리지 않는 부드러운 햇볕을 두고서 한 말이다. ‘백로가 지나서는 논에 가볼 필요가 없다’는 속담처럼 이 무렵은 벼꽃의 수정도 다 끝나고 따가운 가을볕에 벼가 영그는 일만 남아있어 논의 벼를 더 이상 돌볼 일도 없는 때다. 이 무렵이 되면 시골에서는 호박고지, 박고지, 호박순, 고구마 순, 깻잎 등을 거두어들이고 산나물을 말려 묵은 나물로 준비한다.
추분부터 하늘은 높아지며 나날이 푸르러지고, 뜨거운 기운을 담고 있던 바람도 많이 식어져서 바람은 선선하고 상쾌하게 느껴진다. 대기가 건조하여 땅이 마르고 조석으로는 찬 기운이 스민다. 이때부터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아래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 시작된다. 이 무렵이 되면 년중 날씨가 가장 청명하고 기분은 매우 상쾌하여진다. 이때는 들판 어디서나 맑디맑고 푸르디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신선한 바람을 느낄 수 있고, 무르익은 오곡백과와 들국화의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으며 풀숲이나 댓돌 밑에서 구슬프게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와 콩깎지가 건조한 바람에 말라 툭툭 터지는 청량한 가을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이른 아침이라면 풀잎에 맺혀있는 옥같이 맑은 구슬방울을 볼 수 있다. 이때의 가을은 이슬, 하늘, 벌레소리, 바람, 들꽃향기, 따사로운 햇살 등의 청명함으로 우리의 몸을 자극하고 향수와 사색에 젖게 만들기도 한다.
느티나무, 담쟁이넝쿨, 벚나무, 자작나무 등을 비롯해서 단풍이 일찍 드는 나뭇잎들은 추분 절기 중에 상당한 변색을 한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여름내 짙푸르기만 하던 들판이 하루가 다르게 누렇게 익어가는 벼로 인해 바람이 불면 황금빛물결로 일렁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때 들녘에서는 맑은 공기와 따듯한 햇볕으로 벼뿐만 아니라 수수, 조, 등의 볏과 곡식들이 여물어 고개를 숙이게 되는데 더 잘 여물수록 고개를 더 숙이게 되므로 그 모습이 성숙한 인간의 겸손한 자세로 비유되는 까닭이다. 대개들 보면 부족하고 모자라는 사람들이 저 잘났다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목에 힘주며 거들먹대는 모습은 퍽이나 이와는 대조적이다. 대개 빈 깡통이 소리가 요란하듯이 속이 꽉 찬 깡통은 소리도 없이 조용하고 바람이 불어도 날리지 않는다. 가벼운 인간들은 바람이 불면 날려가듯이 언제나 저 잘났다고 촐싹대며 나불댄다.
이때쯤이 되면 고추밭에서는 나날이 고추가 붉게 익어가고 과수원에서는 과일들이 단맛을 더해간다. 아울러 때를 맞춰 파랗고 높은 하늘과 오곡백과가 무르 익어가는 풍성한 들판으로 수놓아진 전형적인 가을의 풍광이 조화를 이루며 광활하게 펼쳐진다. 추분때가 되면 농작물의 수확이 시작되어 풍요로워지고 따라서 그에 감사하는 마음도 생기는 계절이기도하다. 그래서 동서고금에 추분은 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준 수확에 대하여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 있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추수감사절이라고 할 수 있는 추석도 흔히 추분절기 기간에 있다. 서양에서도 추분의 별명인 마본(Mabon)은 오늘날의 추수감사절과 마찬가지로, 본래 한해의 행운을 축하하고 다가올 긴 겨울을 준비하면서 잔치하는 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 축제일을 9월 29일의 대천사 미카엘축일(Michaelmas)로 대체했지만 추수축제의 흔적은 남아 이날까지 추수를 마쳐야했고, 특별히 만든 큰 빵과 살찐 거위로 이날을 축하했으며 이날 이후부터 새로운 농사의 주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분과 관계없는 추수감사절도 있다. 미국의 이웃나라인 북쪽 캐나다에서는 10월의 두번째 월요일, 그리고 미국에서는 11월의 넷째 목요일이 추수감사절인데, 이들은 추분과는 상관없이 정해진 추수감사절로 각자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에 따라 추수감사를 위한 국경일로 정부가 정한 것이다.
별다른 얘기로는 한국의 경우, 이맘때 추분 전후로 남해안과 동해안에서 주로 잡히는 생선가운데 전어(錢魚)가 있다. 전어는 작은 생선이지만 맛이 좋아서 그 생선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하여 돈 전(錢)자를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가을의 전어 대가리엔 참깨가 서말, 또는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가 다시 돌아온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전어는 특히 가을철에 살이 오르고 먹음직스럽다.
또 이 추분 무렵에는 새로운 세대의 낙지들이 갯벌로 올라오는데 연하고 부드러워 이 가을철의 어린낙지를 꽃낙지라고 해서 연중 최고의 맛있는 낙지로 친다. 이민 오기전 옛날 서울의 무교동 낙지집에 가면 산낙지 중에서도 추분이 시작된 가을의 꽃낙지가 최고로 비싼 값에 매겨져 막걸리와 함께 식탁에 올려져 주빈 노릇을 하며 그 꿈틀거리는 놈을 산채로 입안에 넣으면 입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것을 씹는 맛은 징그럽기도 하고 맛도 좋았다.
어느 해인가 외국의 취재팀들이 방문하여 이렇게 살아있는 낙지를 먹는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는 광경을 본적이 있다. 몬도가네 실화 촬영장면였든것 같다. 어쨌거나 이 모든 일들이나 추억들이 추분때 시작되는 연례적인 것들이기에 생각과 기억을 더듬어서 적어보았다. 지나고나보니 그 옛날이 그립다…………….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 1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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