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소박한 삶 살아가기………..!

<김명열칼럼> 소박한 삶 살아가기………..!

사자성어로 단식표음(簞食瓢飮) 이란 말이 있다. 이 뜻은 대나무로 만든 밥그릇에 담은 밥과 표주박에 든 물이라는 뜻으로, 청빈하고 소박한 생활을 이르는 말이다.

소박한 삶은 건강한 인간을 만들어 내고 좋은 습관은 기존의 삶을 더욱 가치있는 것으로 변화시켜 준다. 좋은 친구를 두루 사귀고 마음의 양식을 충족시켜주는 좋은 글을 읽는 것은 평범한 삶을 보다 가치 있고 자신의 품격을 높여준다.

우리들 인생이라는 배에 지나치게 많은 욕망을 싣고 갈수는 없다. 과도함은 우리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 그러니 최대한 지나친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매사에 자유롭고 편안함을 누릴수 있다. 욕망의 노예가 되면 인생은 복잡해진다. 행복은 손에 닿을 수 없는 저 먼곳으로 달아나 버린다. 욕망과 통제라는 두 길 사이에서 자칫 한쪽으로 치우치면 위험해지기 마련이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한다. 살면서 겪게 되는 많은 일들은 그것이 즐거운 일이든 슬픈 일이든 간에 마음속에 차곡 차곡 쌓여간다. 하나 둘 쌓여 갈수록 마음은 어지럽고 복잡하게 변해간다. 고통스러운 감정과 불쾌한 기억, 욕심과 허영으로 가득찬 마음을 청소하지 않으면 마음은 곧 회색빛으로 뒤덮이게 된다. 사물을 선명하게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판단하여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에 있어 정확성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다.

반면 쌓인 먼지를 털어내면 마음이 밝아지고 모든 것이 더 분명해진다. 불 필요한 기억을 털어내면 행복이 차지할 공간도 사뭇 더 넓어진다.

소박하게, 그리고 검소하게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내가 젊었던 학창시절, 등산백 하나 짊어지고 지리산 골짜기 계곡의 어느 산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목도 마르고 아픈 다리도 쉬어 갈겸 해서 눈에 보이는 어느 산사(山寺)에 들어갔다. 조그만 암자에 기거하는 그 스님은 하루 세끼를 쌀, 보리, 콩, 솔잎으로 만든 곡차로 생활하는 것을 보았다. 나에게 권하기를, 시험 삼아 이틀만 이것을 먹으며 지내어 보라고 권하기에, 이틀은 시간이 없고, 하루정도는 시음하며 지내 보겠다고 하며, 그곳에 머물며 체험해 보기로 했다. 이후 사찰 주변을 산책하고 경내에 돌아와 마루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주지 스님인 그분께서 “학생 이리와서 내방에서 저녁이나 먹지” 하며 나를 스님 방으로 부른다. 그곳에 가보니 조그만 상 위에는 나무, 목각대접에 두 그릇의 곡차가 담겨져 나와 있고 곁에는 조그만 종지 접시에 굵은 바다소금이 담겨져 있다. 스님 얘기인즉 소금은 우리몸에 염분섭취는 필수이기에 곡차를 마시고 난후 서너알갱이 먹어두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렇게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친후 나는 스님의 설법 말씀에 심취되어 두시간 정도를 강의를 듣고 일찍 스님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자리에 누었으나 잠은 오지 않고,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다. 아침 일찍 산에 오르면서 여관집 주인이 싸준 찐 계란 4개와, 김밥, 빵 두개가 오늘 식사 메뉴였는데, 이미 그것은 산에서 내려오면서 모두 먹고 난 뒤였다.

절에 가면 배고픈데 뭐라도 얻어먹을까? 해서 들렀는데, 상황이 여~엉 이상하게 변해있다. 머리속에서는 온갖 먹을 것들이 떠오르면서 배가 고파 통 잠이 오질 않는다. 그러한 고통? 속에 설잠을 자고, 아침 역시 곡차로 때우고 나서 황급히 절을 떠났다. 산 아래 동네로 내려와서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설렁탕 한 그릇에 밥 두 사발을 게눈 담추듯 입속으로 삼켜 넣었다. 도대체 그 스님은 일년내내 어떻게 저렇게 곡차만 드시고 살아가실까? 생각을 해 보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고려말 여려병(呂麗秉)이란 학자는 콩을 삶아 방 벽에 바른 후, 책을 읽다가 허기가 지면 벽에 바른 메주콩을 떼어 먹었다고 한다. 음식을 건강 지킴이로 본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수단으로 본 것이다.

그럼 한국의 재벌 회장들은 기름지고 값비싼 좋은 음식만 먹고 살까?

한국 최초의 재벌인 삼양사의 김연수회장은, 한 끼의 반찬은 세가지를 넘지 못하고 밥이나 반찬이 남아서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일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도 조선의 최고 부자이면서도 땅에 떨어진 밥알을 주워먹었다. ‘천길 땅을 파 보아라 쌀 한톨이 나오나’ 그 집안의 며느리가 들려 준 얘기는 ‘재벌집이라고 시집을 왔는데 새벽에 일어나면 꼭 한복을 입어야 했고 반찬을 남기지 않으려고 양을 줄이다 보면 서열상 집안의 꼴찌인 며느리는 배고플 때가 참 많았다’고 했다.

조선시대 최고학자 퇴계 이황선생은 대 학자답게 검소하게 사셨다. 그는 한평생 반찬을 세가지 이상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들면 무말랭이와 가지 무침, 산나물 정도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혹여 귀한 손님이 오면 간 고등어를 내놓았다고 전해진다. 퇴계 이황선생이 가난해서 소박하게 드셨을까?….. 세상에서 사람을 살리는 음식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모름지기 선비로서의 삶이 그랬어야 했기에, 만인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그랬을 것이다. 충분히 호의호식 할 수 있었음에도 선비로서의 검소한 삶을 보여주는 것, 설중매처럼 ‘선비의 상’이 참으로 고고하지 아니한가.

음식 쓰레기, 옷 쓰레기, 일회용품 쓰레기, 전국 아파트마다 재활용품 수거함 속엔 아직 입을수 있는 옷들이 가득가득 쌓여 있고, 구두와 신발은 물론 음식을 먹지 않고 버리는 음식쓰레기는 하루에도 수백톤이 된다고 한다. 지구촌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기아선상에 허덕이며, 북한에서는 몇년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몇십만명이 굶어죽었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 주변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양극화와 부의 편중에 의한 구조적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극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은 물질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문제다. 이를 알라! 소나무는 진달래를 내려다보되 무시하지 않고, 진달래는 도토리나무를 올려다봐도 부러워 하지 않는다. 이 땅위에 같이 살고 있는 철새인 제비들은 머나먼 강남땅에서 오자마자 둥지부터 짓는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기보다 잘 살고 있는 남들과 비교하다가 사는 집이 투기의 수단이 되어, 집없는 가난과 불행을 구조적으로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행복해지고 싶거든, 부자가 되고 싶거든,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부자도 밥 한 그릇, 가난하게 살아도 밥 한 그릇 이다.

우리 사회는 급속한 경제성장과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활의 풍요로움과 안락함이 주어졌다. 누구나 부자가 될수 있다는 믿음과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쾌락의 상품’ 유혹은 현대인을 더 바쁘게 몰아놓았다. 바쁘고 화려한 것이 성공의 상징처럼 보였기에 단순함과 소박한 성찰은 뒤떨어진 철학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필요 이상의 사치와 욕망이 행복의 조건을 끌어내지 못하고 삶의 존재와 가치를 훼손시키는 우를 범했다. 현대인들이 끊임없이 탐욕과 부를 축적하기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거는 어리석음에 봉착한 것이다. 과연 경제적으로 풍부해졌지만 행복한가? ……..

사치와 낭비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뭘까?

능력 범위 내에서 사치를 하는것은 지혜로운 행위인가? 소박함과 단순함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논쟁은 삶에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이렇게 어려운 의문점에 자문자답, 즉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기가 어려운 의문점이자 부와 단순함, 행복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임은 분명하다.

여기서 참고로 헨리 하워드가 쓴 시 한편을 소개하여드리겠다.

낭비가 없으면 부족한 게 없다. 한푼 아낀 것이 한푼 번 것과 같다. 함부로 낭비하면 가난으로 울게 된다. 푼돈을 아끼는 습관은 돈의 가치를 알게 한다. 확고한 원칙을 세워둔다면 사치의 유혹에서 벗어날수 있다. 입이 호사스러우면 가난이 친구로 다가온다. 사치에 빠지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바보는 잔치 상을 차리고 현자는 그것을 즐긴다. 열심히 벌고 열심히 아껴라. 허영심은 언제나 수치를 가져온다. 단순한 삶은 신의 뜻이 가장 부합하는 삶의 형태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어쩌면 이것은 우리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한 길잡이 이자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부의 축적은 성공과 사회적 지위의 척도가 되었다. 돈은 일하는 사람들의 동기가 되었고, 돈 버는 행위로부터 삶의 가치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돈과 행복이 완전히 비례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부자 워렌 버핏은 자신의 재산 99%를 기부하고 게이츠 재단에 300억달러를 기부했다. 그리고 그는 1958년도 구입한 집에서 60여년 넘게 살고 있다. 그 집은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약 7억원에 불과하며, 그 돈으로 한국의 강남이나 서울에 전세방하나 얻기도 힘든 돈이다. 그렇지만 그는 ‘난 지금 사는 집에서 행복하다’고 한다.

자동차도 2014년 형을 타고 다녔는데, 딸이 ‘아버지 차가 너무 오래돼서 창피하다’는 말로 인해 새 차로 바꿨다. 보통 사람들은 그의 투자방식도 따라 하기가 어렵지만, 검소한 그의 생활도 도저히 따라서 하기 어렵다.

세상에 보면 오늘날, 네가지 분류의 사람이 있다. 돈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돈이 없어도 행복한 자, 그리고 빚진 자다.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과소비와 만연된 탐욕과 방탕으로 그들이 바라는 삶과 동떨어진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긴다.

소박함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은 겉에 나타난 모습에 싫증이 난다. 이런 지루함을 날려보내기 위해 온갖 레저스포츠 활동이나 향락에 빠진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인 동시에 지극히 어리석은 종족이다. 자신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지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생각 하려고도 않기 때문이다. 단순함은 그 자체로도 좋을뿐만 아니라 덕을 배양해 주고 사회적 책무를 수행한다. 단순함은 미적인 모범을 보여주며 진정한 평안함을 준다는 것을 느낀다.

단테의 ‘신곡’에서 보면 인색한 자와 낭비한 자는 함께 네번째 지옥에 던져진다고 했다.

최근 푸 리서치센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18세에서 24세의 미국인 64%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부자가 되는 일이라고 답했다. 갤럽의 설문 조사에서도 같은 비율의 응답자가 부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흔히 더 많은 것을 가져야 더 행복해질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불행해 질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살아간다. 탐욕을 버리고 나를 옭아매고 있는 욕망의 굴레에서 완전히 자유로울때, 비로서 마음이 편해지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서 말이다. 검소하고 소박한 삶의 실천은 우리를 더욱 풍요롭고 행복한 인생으로 이끌어 줄수 있다. 현실에서 이상을 찾기는 어렵지만 이상에서 현실을 구할 수는 있다. 가치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기 원하고 그러한 삶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나의 현실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문학 작가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433/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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