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열정과 사명감을 갖고 산다면………..!
징기스칸에게 열정을 뺀다면 그는 한낱 양치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열정이 이렇게도 중요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열정을 갖고있지 않은 사람도 많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자신의 열정을 잊어 버린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열망과,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사회생활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사이인가 모든 것이 흐릿해지고 마는 것이다. 경제는 어렵고 집안일, 자녀교육, 밀려드는 고지서, 힘겨운 직장생활 등으로 신경 쓸 일들은 끝이 없다. 그러니 열정은 고갈될 수 밖에 없다. 영감을 자극하는 일들은 먹고사는 일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난다. 인생의 경험은 안정된 삶을 위해 희생되고 만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열정은 만들어지는게 아니다. 노력한다고 해서 스스로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 열정은 자기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를 찾아 그것에 매진했을 때 그때 자기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다. 먼저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사명감을 갖고 하나만을 억척스럽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만이 어떠한 일이든 성취해 낼 수 있다. 능력은 어느 정도 부족해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얼마나 사명감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충분히 보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정은 그 사람이 마음먹고 달려들지 않는다면 결코 생기지 않는다. 열정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에 자발적이며 할 수 있다는 스스로의 믿음으로 똘똘 뭉쳐있다. 열정의 중요한 특징중 하나는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만약 전염성이 없다면 그건 열정이라고 할 수 없다. 열정이 없는 것은 전기가 없는 전자제품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기능이 탁월하고 우수한 제품이라고 해도 전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능력을 흡수하면서 자신이 가진 능력 이상의 능력을 펼쳐낼 수 있다. 마르지 않는 열정의 샘은 성공으로 가는데 필요한 처음이자 마지막 요소이다.
만약에 우리 인간들에게 사명이 없으면 살아도 이미 죽은자와 다름없다. 사명이 희미해지는 순간, 삶도 목적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사명이 살아갈 이유와 동기를 끝없이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생명력을 가지고 충만하게 일하며 살기 위해서는 사명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혹시라도 매순간 의욕이 떨어지고 오랜 침체를 겪고 있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사명이 견고한지 다시한번 점검해보아야 한다.
사명은 사전적으로 ‘맡겨진 임무, 받은 명령’등을 뜻한다. 내가 왜 이 땅에 사는지. 존재의 의의가 바로 사명이다. 또 다른 의미로 소명, 즉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사람이 태어난 목적을 이루고, 어떻게 사회에 기여하며 살 건지를 말할수 있다. 사명은 한사람의 탄생부터 삶의 방식, 죽음까지 모든 활동의 근원이 된다.
박성후 작가는 ‘나의 생각과 말, 행위, 습관, 인간관계, 직업, 가정 등 살아가면서 실천하는 모든 역할들은 사명으로부터 시작되어 외면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중심축인 사명의 움직임과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즉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마지막 질문은 바깥 바퀴인 자신의 삶의 궤적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되는 것이다‘라고 글을 쓰기도 했다.
결국 우리의 모든 활동은 이 사명, 인생 메시지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예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명이 불분명한 사람은 메시지가 없는 글처럼 공허하고 초점 없는 인생을 살수 밖에 없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우리 각자의 진정한 소명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라고 말했다. 사명의 시작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 자기 내면의 진실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서 충만한 자신을 찾고 주변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자신의 존재 이유에 맞게 살며, 세상에 의미있는 울림을 남길 수 있다.
나는 가끔 혼자서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아니 이것은 나 혼자만의 질문이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글쓰기와 독서를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글을 쓴다는 것은 쉽고도 어렵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지도 꽤나 오래됐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시카고에 살 때, 그곳에서 발행되는 한국의 일간지 중앙일보를 비롯해 코리아 트리뷴, 교차로, 기독교 신문 등 여러 신문이나 주간지를 통하여 매주 빠짐없이 심혈을 기울여서 쓴 글을 게재하기 시작부터이었다. 그러 하다가 현업에서 은퇴하고 플로리다 탬파로 내려와 살면서, 요즘은 이곳에서 발행되는 현지신문, 본보 플로리다 코리아에 매주 칼럼의 글을 써서 게재하여 드리고 있다. 이곳 플로리다 코리아에 글을 써 올린지도 어언 만으로 15년이 넘었다. 매주 빠짐없이 글을 써 올리며 사명감과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열심히, 열심히도 글을 써 왔다.
내가 쓴 글을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글귀를 알리고 싶고, 글을 통해서 영감을 주고 싶었다. 그러한 강력한 동기가 있었기 때문에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한국에서 중동으로 파견된 어느 국군 아저씨가 열사(熱沙)의 땅에서 더위를 이기며 잠시 쉴 때, 인터넷으로 올려 진 나의 글을 읽으며, ‘많은 힘과 위로를 받았다. 김 작가님의 글은 마치 이 무더운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 매주 연재되는 작가님의 글을 읽는 재미로 이국땅에서 힘들고 외로운 싸움을 이겨내고 있다’라는 답신을 받았을 때, 나는 더욱 어깨가 무거워졌고, 내가 아는 무언가를 나눠야 한다는 사명감을 통감했다. 그러한 사명감이 지금까지의 나를 있게 한 것 같다.
사람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사명감이 강한 목적을 만들고, 그것이 열정을 만들었다. 독서하고 글을 쓰는 습관을 만들었고, 실행하도록 했다.
삶이 바뀌면서 기쁨과 행복, 보람을 느끼고, 세계 여러나라 지구촌 곳곳에서 나의 글을 애독하는 많은 독자들을 위해서도 이를 더 널리 널리 알리고 싶은 사명감이 들었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사명감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이끌어진다고 볼수 있다. 사명감이란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려는 기개나 책임감을 말함이다. 우리들의 사회가 자꾸 변화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원동력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활약 때문이다. 맡겨진 임무를 수행한다는 정신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완수했다는 의미이다. 복잡하고 난해한 구조를 명쾌하고 쉽게 풀어가는 과정이야말로 자기 임무의 완수일 것이다.
나의 고교 학창시절, 유난히 열성적인 선생님이 계셨다. 그분은 학생 개개인의 신상 파악은 물론, 현재 처해진 어려운 환경까지도 모두 파악해 그것에 맞게 학생을 지도하셨다. 새벽같이 출근해서는 학교 구석구석을 순찰하고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하며 교내 정화를 위해 거의 시간을 보내신 분이셨다.
학습지도는 물론이고 운동부에도 많은 관심을 가진 결과 여러 종목의 운동부를 최강 팀으로 끌어올린 선생님이셨다. 그렇다면 이분의 열정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마도 교육자로서 확고한 사명의식 때문에 거의 평생을 열심히 봉직하신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고귀한 사명감이 없었다면 그토록 초지일관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한마디로 교육자로서의 변함없는 사명감일 것이다. 교사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에 비해 더 특별한 직업의식과 사명감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요즘 “교권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표현이 심심찮게 쓰이고 있다. 교육이 붕괴하면 나라의 미래가 무너지는 것으로, 이럴때 사명감 있는 선생님의 발자취가 그리울 뿐이다. 물론 오늘날의 교육문제는 제도적인 문제도 있고 학부모 자신들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그럴수록 교육자의 열정이 사명감으로 오래 지속이 될 때 교육은 살아날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의 사명지수가 높을때 그 나라의 살림살이는 균형과 발전을 이뤄나갈 것이다. 우리는 부끄럽게도 비뚤어진 사명의식의 잘못된 철학을 가지고 나라와 국민을 어렵게 만드는 많은 정치가들을 보아왔다. 더 한심한 것은 그렇게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그 행위에 대한 뉘우침이나 죄책감 및 반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독일 히틀러의 만행을 생각해 보자.
그는 세계정복의 꿈을 품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무자비하게 유태인을 학살했다. 또한 파시스트 당을 이끌고 독재정치를 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어떠했나?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과 일본을 한데 묶어 3국 동맹을 맺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무수한 희생을 연출한 독재자였다. 패전후 국민들에 의해 처형되지만 잘못된 사명 의식의 비참함은 본인뿐만 아니라 인류 모두를 괴롭혔던 것이다.
이처럼 지도자의 잘못으로 전쟁, 재난, 살육, 황폐화 등의 피해를 입었고 그것은 경제손실, 사회질서 붕괴, 의식의 타락 등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사회조직원 개개인의 의식구조가 잘못된 관행과 일치가 되어 부작용이 생길 때 현대에 와서는 더 큰 타격을 받을 수가 있다.
이렇듯 잘못된 사명감은 또 다른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다. 거짓말이 난무하고, 말 바꾸기가 상식인 것처럼 되어버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준 높은 사명감이다. 정의롭고 편파적이 아닌 의식구조를 가진 사람이 올바른 사명감을 가지고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해서 노력할때 우리들의 사회는 밝아지고 투명해지며 살기 좋은 복지사회가 이루어 질 것이다.
<문학 작가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407/2024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