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고독과 외로움을 느낄 때………

<김명열칼럼> 고독과 외로움을 느낄 때………

혼자 있어도 외롭고, 같이 있어도 외롭다. 세상에는 내 편이 하나도 없는것 같아 고독하고 외롭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의 일상은 많은것이 변했다. 출근 대신 재택근무를 하고,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극심한 외로움을 느낀다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서울의 어느 설문조사 기관이 밝힌 기사를 우연히 며칠 전에 읽은적이 있다.

과거 많은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코로나 19처럼 특별한 상황이 아니어도 우리는 자주 고독함과 외로움을 느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을때, 연락처를 뒤적여도 연락할 사람이 없을때, 나만 빼고 다른사람들은 모두 잘 살고 있는 것 같을때, 나는 외로워진다.

칠흑같이 어둠이 장막을 드리운 밤, 사색에 잠기다보면 어느새 고독이 란 친구가 머리속으로 스며든다. 이렇게 고독이 밀려오는 밤이면 밤 하늘의 무수한 별빛을 보면서 사색에 잠긴다. 차가운 겨울의 밤 공기처럼 날카로운 칼 날로 나를 향해 찌르듯이 고독은 형태없는 형상으로 나의 마음을 가르고 있다. 그 무게의 힘이 마치 태산을 지고 가는 사람처럼 힘겹게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어느 공간에서 고독이 부르는 곳을 향해 눈을 돌려보면 어느덧 나의 가슴속은 차디찬 공기속에 싸여있다.

녹지 못하는 영하의 날씨처럼 꽁꽁 얼어붙어버렸다. 이러한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진정한 승리자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삶의 승리는 스스로 딛고 일어서는 고독의 문을 향해 노크하는 것이다.

긴 밤을 지나 지루한 하루의 연속된 삶의 고독은 마치 마른 꽃잎에서 향이 사라져가는 느낌을 안겨준다. 우리에게 점령군처럼 쳐들어오는 이 고독은 그렇게 소리없이 공간을 채워간다. 고독이 전해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본다. 조용히 다가오는 그 심장을 가르는 아픔과 인내의 시간이 지나면 고독도 무감각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일상이 고독이고 그 고독이 노래가 되며 시가 된다. 우리들 각자의 세상은 이따금 고독과 외로움으로 채워져, 마치 솜바지 저고리를 입고 물속을 헤엄쳐 가는 듯한 부자유스러운 중압감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환상을 느낄때가 종종 있다.

오늘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두번씩, 또는 지속적으로 동반하고 살고있는 고독과 외로움에 대하여 펜을 옮겨보고자 한다.

고독과 외로움,

이 단어는 현대사회에서 많이 우리의 생활속에 등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갇혀서, 마치 투망속에 갇혀있는 물고기 처럼 그물을 탈출하지 못하고 오늘도 그 속에서 파닥거리는 고기처럼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다. 미국의 의무감(醫務監)을 지낸 비백 머시는 자신이 평생 의사로 일하며 맞닥뜨린 가장 흔한 병은, 심장병도, 당뇨병도 아닌 외로움이었다고 말했다. 만성적인 고독은 하루에 담배를 15개비 피우는 것과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비만보다 오히려 사람에게 치명적인 무서운 존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분명 고독과 외로움은 공중보건 분야에서도 주목해 다루는 문제가 되었다.

마치 전염병처럼 다뤄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고독의 원인을 찾아 해결책을 마련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나는 낭만주의 시대 시인들이 고독을 어떻게 표현을 했을까? 를 궁금히 여기며 자료를 찾아보다가, 사실 이 고독이라는 개념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한때는 고독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치료할 수 있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다만 고독 혹은 외로움이 뜻하는 바가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바뀌어 해결책을 찾기도 훨씬 어려워졌다. 아주 먼 옛날부터 우주 어디에나 있었을 것 같은 “외로움”이라는 개념은 사실 16세기 말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때 등장한 외로움이라는 개념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개념과 조금 다르다. 단지 사람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오는 위험의 신호 정도로 여겼다. 근대 영국 초기, 사람들은 사회에서 멀리 떨어져 산다는 것을 사회가 제공하는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외딴 곳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행여 그사람이 당신을 해치려 할때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고, 그래서 인적없는 숲이나 산골짜기는 두려운 곳이었다.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에 등장하는 지옥이나 무덤, 사막같은 곳이 두려운 이유 또한 다른 무엇보다도 외로움 때문이었다. 외로움과 고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상기시켜 종교 지도자들은 신도들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고 설교했다.

존 밀턴이 1667년 발표한 서사시 “실낙원”(失樂園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이 1667년에 발표한 장편 서사시로, 인간의 타락과 구원을 주제로 하고 있다. 단테의 신곡과 함께 불후의 기독교 대 서사시로 평가된다. 단테의 신곡이 카톨릭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면, 실낙원은 개신교적 청교도적 가치관을 반영하는 작품이다) 속의 악마는 아마도 영국 문학작품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첫번째 등장인물 일거다. 에덴동산에 있는 이브를 유혹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악마는 자기가 사는 지옥을 벗어나 ‘외로움 걸음, 걸음’을 내딛는다. 밀턴은 구체적으로 악마가 어떻게 느꼈는지 묘사하거나 서술하진 않았다. 대신 그는 악마가 내디딘 지옥과 에덴동산 사이에 있는 궁극의 황야가 지금껏 그 어떤 천사도 밟아본 적 없는 곳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위태롭다고 하는 악마의 말속에 외로움이 묻어난다. 악마도 느껴보는 외로움, 그리고 고독…….. 이세상에 티끌만치도 오염되지 않은 마음이 어디 있을까? 오염되지 않을 생리적, 심리적, 의학적인 논리는 무엇인가?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 말 듯 한, 있는 듯하고 없는 듯한 고독감, 동양의 무(無)와 서양의 존재(being)라는 개념으로 보아도 ‘고독함’은 미묘하기도 하고 때론 허무하기도 하다. 고독하다는 사람에게 “그래, 어디 한번 고독을 증명해봐” 라고 묻는다면 그리 쉽게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자주 자리 잡는 고독감은 관계, 물체, 공간, 시간과 관계가 깊은 주관적이며 감성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계’란 만남의 소통이고 ‘물체’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물, 자연이고, ‘공간’은 운동이며 ‘시간’은 우리 삶의 역사라는 점에서 그렇다. 고독은 이러한 요소들과 함께 때로는 명료한 ‘자기 인식’으로, 때로는 모호함(말로 표현할수 없는)으로 나도 모르게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 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신과 함께 신묘한 즐거움, 맑은 영혼을 누리기란 결코 쉽지 않아서 우리들의 감정은 늘 코스터를 탄다.

인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조리한 존재다. 인간은 각자 개별자로서 자아에 집착하여 타인과의 소통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한 아파트에 살면서도 우리는 이웃을 잘 알지 못한다. 많은 경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지 관심도 없다.

사람들 간에 정이 오고 가지도 않는 고독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얘기다.

외로움과 고독, 사회적 고립은 흔히 함께 다뤄지는 듯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영어에서 외로움(Loneliness)과 고독(Solitude)은 별개 현상이다. 흔히 외로움의 경험은 고립과 고독이라는 현상과도 구별된다. 외로움은 우리가 경험하는 기분인데 이런 기분은 주관적인 마음의 흐름이고 내면의 침잠된 느낌이다. 고립은 분리되어 있는 실제적 상태를 의미하는데, 측정할 수 있고 어느 정도 통제하수 있는 외부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이다.

고독은 침묵속에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라면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고통이다. 더욱이 고독의 감정은 영적인 것이다. 사랑을 만들어가는 삶의 에너지를 창조하는 힘이 된다. 그리고 고립을 평가할때 그것은 내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으로 변한다. 사회적 관계가 부족할때 사회적으로 고립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고독과 외로움은 동의어가 아니다. 고독은 외롭게(孤=고) 홀로(獨=독) 있다는 뜻으로 홀로 독은 홀로 하는 행동과 홀로 있는 존재의 상태로 나눠 볼 수 있다.

홀로 있다는 상태는 홀로 행동하지 못해서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다. 홀로인 상태는 존재의 문제이고, 홀로 행동한다는 것은 인간관계 혹은 뭔가 관계 부재를 찾아서 대처하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외로움은 ‘혼자라는 느낌’이고 고독은 ‘혼자 있는 것’ 자체이다.

고독은 자신의 자율과 선택에 따른 것이고 영감(靈感)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 고독(혼자 있는 것)은 창조적인 활동으로, 꼭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98/202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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