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죽을때 편안히 잘 죽자.

<김명열칼럼> 죽을때 편안히 잘 죽자.

옛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복(五福)을 잘 타고 나야 보람되고 행복하게 세상을 살다가 떠난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들의 인생 여정에 이러한 오복은 정말로 필요하고 인생사의 가치와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를 판가름해 볼수 있는 기준의 잣대와 같다고 하겠다.

우리나라 한국사람 치고서 오복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을 못하는 사람도 많다. 어느 사람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5복이 뭐냐고? …… 그랬더니 이런 대답이 많았다. 초복. 중복,말복, 8.15광복, 9.28수복, 이렇게…… 복이란 글자가 다섯개니까 오복이 맞긴 맞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에 서경(書經) 홍범 편에 있는 오복을 기본으로 인정하고 있다.

(1)수(壽) 오래 사는것, 이것은 세계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염원이다. (2)부(富) 부자가 되는것,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재산은 꼭 필요하다. (3)강녕(康寧) 건강한 것, 강(康)은 육체적인 건강을 뜻하고, 녕(寧)은 정신적 건강이다. (4)유호덕(攸好德) 남에게 선행을 베풀어 덕을 쌓는 것, 놀부나 욕심쟁이처럼 자기 자신만 아는 부자는 진정한 복이 아니다. (5)고종명(考終命) 천수(天壽)를 다 하는 것, 즉 우리는 누구나 죽음의 복을 잘 타고나야 한다. 질병없이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없이 편안하게 일생을 마치는 것도 크나큰 복이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행복하고 편안한 것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불안과 공포,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 중 가장 큰 것이 죽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죽음이 이 고통이라는 주제와 무관하지 않다면 웰-다잉 (Well-dying)역시 고통에 대한 이해 안에서 재고가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죽음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는 대부분 고통이 동반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기 전 죽음의 원인이 되는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육체적 고통에 시달린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고통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이란 어떤 면에서 탄생의 순간부터 서서히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죽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인생 안에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이것을 알기에 아기들은 태어나는 순간 그렇게 강렬하고 서럽게 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부처는 ‘생로병사가 모두 고통’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여 인간이란 고통으로 번뇌하는 존재임을 직시하게 하였다.

부처는 인생이 고통이라는 자각이야 말로 해탈에 이르는 출발점 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웰빙을 추구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하나를 더 보태어 행복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고자 웰 다잉(Well-dying)을 제안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때는 순서가 있어도,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사….. 그러나 한번쯤은 우리가 죽음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듯 하다. 대개들 보면 어느 누구나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몸을 사리고 거부감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언젠가는 필연코 닥쳐 올 운명이라면 한번쯤은 심사숙고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잘 죽을 준비, 웰 다잉은 행복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웰빙(Well-being)이란 말이 유행한지도 오래됐다. 사람들은 흔히 웰빙을 단지 잘 먹고 잘 산다는 뜻으로만 이해하는데, ‘잘 산다’라는 말에서 ‘잘’에 부여하는 의미는 여러 가지 일 것이다. 웰빙과 관련해 사람들이 쉽게 간과 하는 문제,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문제가 바로 죽음이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잘’ 살았다고 한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지 못 했다면 ‘잘’ 살았다고 할수 없다. 흔히 행복한 삶, 건강한 삶만 생각할 뿐이지만 ‘행복한 죽음’ ‘건강한 죽음’도 중요한 문제다. 어떤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결코 행복하지 못 하다면, 그는 진정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다. 웰빙의 완성은 웰 다잉에 있으므로 이제 우리는 웰빙을 삶의 문제에만 한정시킬게 아니라 웰 다잉에 까지 확대해야 한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라고 달라이 라마가 말했다. 삶을 이치에 맞게 살지 않고서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사는 법을 익혀야 죽음을 평온하게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수 있으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죽음의 임박성을 의식하면서 살 때 ‘내게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사람마다 죽는 모습이 천차만별인 것은 결국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은 곧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지니고서 죽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다. 죽음은 삶과 둘이 아니므로, 죽음을 이치에 맞게 이해하지 못하면 삶 역시 바르게 살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해가 바로 ‘죽으면 다 끝나는게 아니냐’는 생각이다. ‘죽어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자살하는 사람도 많다. 달라이 라마에 따르면 ‘죽음이란 옷을 갈아입는 과정’일 뿐이므로 영혼이 육신의 옷만 벗는 것이다. 생사학의 창시자 퀴블러 로스 박사는 죽음에 직면한 어린아이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몸은 번데기와 마찬가지이다. 죽으면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나비처럼 예쁘게 날아서 천국으로 날아간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야 비로서 죽음을 생각하므로 지나간 삶을 후회하면서 남은 삶을 마감하게 된다.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례가 많고 자살 사망률이 최근 들어 급증하는데다가 또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미소 속에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우리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죽음에 대한 인식 전환이 시급한 상황이다. 죽음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 삶을 바르게 영위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죽음 준비 교육은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삶을 더욱 의미있게 살도록 하고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삶의 준비 교육이기도 하다.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열한명의 아들 딸을 훌륭하게 키워낸 미국의 한 할머니(91세)가 혼수상태에 빠졌다. 온가족이 다함께 모여 할머니를 위해 기도를 했다. 기도가 끝나자 할머니는 눈을 번쩍 뜨고서 “나를 위해 기도를 했구나. 고맙다, 그런데 위스키 한잔 마시고 싶은데” 라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위스키 한잔을 가져오자 할머니는 한 모금 마시고는 “미지근하니 얼음 좀 넣어줘” 라고 말했다. 두시간 밖에 살수 없다고 여겨지는 할머니가 얼음까지 요구하니 모두 충격을 받았다. 얼음을 넣어주자 “맛있다”라고 말하면서 전부 마셔버렸다. 이어서 “담배를 피우고 싶구나’ 라고 말했다. 여유있게 담배 한대 피우더니, 가족들에게 감사를 표한 뒤, “천국에서 만나자 안~녕” 이라고 말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그때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는 평생 위스키나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할머니는 91세까지 장수하면서 많은 장례식에서 모두가 애통하게 우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자신이 죽으면 사람들을 슬프게 할 게 아니라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주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건강한 삶을 원하듯이, 마찬가지로 누구나 건강한 죽음을 원할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사람들은 마치 불행한 죽음을 준비하는 것처럼 죽음앞에서 크게 흔들린다.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만 생각했을 뿐,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르지 않으며 하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으므로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물음은 이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물음은 너무 세속적인 틀에만 얽매이게 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보다 포괄적이고도 심층적인 문제 제기이다. 더구나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그 삶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다. 죽는 바로 그 순간 좋든 싫든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 삶에는 거짓이 통용되지만, 죽음의 순간 자신의 존재의 값어치는 남김없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죽는 시간을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이 찾아올 때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 어떤 식으로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정할 수 있다.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고,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74/202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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