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아버지(아빠)는 외롭다.

<김명열칼럼> 아버지(아빠)는 외롭다.

“엄마가 있어서 좋다. 나를 이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어느 잡지에 실린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썼다는 ‘아빠는 왜?’라는 시(詩)다. 아빠라는 존재가 초등학생 아이에게 냉장고보다, 강아지보다 못한 존재인 듯한 모습에 글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남자로서 또한 한 가정의 아빠로서 서글픈 마음마저 든다. 이것이 어느 한 아이에게만 국한된 얘기 일까?…….

이 아이의 글을 보면서 아빠라는 자리, 남편이라는 자리가 외로움과 외톨이가 된 느낌을 갖게 해 준다.

요즈음 언론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성인남성(아버지)들의 고독사와 자살, 각종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들이 늘고 있다는 뉴스가 사람의 가치나 존엄을 망가지게 한다. 초등학생이 쓴 글에서처럼 자신 위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이라서기보다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러분들도 보셨겠지만, 오래전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할아버지가 문제를 내고 할머니가 맞추는 퀴즈 시간이었다. ‘천생 연분’이라는 문제 단어를 보고 할아버지가 ‘당신하고 나 사이’라고 질문 한다. 이때 돌아온 할머니의 대답은 ‘웬수’다. 그러자 화를 내듯 ‘아니 네 글자로 우리 사이’라고 고함을 치자 한참을 생각한 할머니의 대답은 ‘평생 웬수’ 라고 대답한다.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을까. 평생을 함께 했다고 생각한 남편의 자리, 애들 아빠의 자리가 ‘평생 웬수’가 된 듯하다.

지나간 옛 시절, 나의 어린 시절, 형들을 따라 배운 낚시에 재미가 붙어, 학교에 갔다 와서는 시도 때도 없이 집 앞 연못에서 낚시를 할 때, 농사 일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막내아들 낚시 바늘에 지렁이를 끼워주며 등을 토닥거리며 “많이 잡거라” 하며 즐거워하시던 나의 아버지 모습은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눈에는 ‘아빠는 왜 있는지?’라는 의문이 들 정도의 필요 없는 존재의 하찮은 아빠였나?……..! 지금은 볼 수도 없고 고맙다는 인사 말씀도 할 수 없는 먼 세상, 다른 세상에서 살고계시는 아버지이지만, 어릴 적 먹을 것과 빈 깡통(큰 것=6.25전쟁후 미군이 구호물자로 나눠준 우유가루 깡통) 하나 들고 산속에 들어가 계곡물에서 가재를 잡으며, 잡은 가재를 마른나무 가지를 주워 다 돌 것 위에 쌓아놓고 버드나무 꼬챙이에 꿰어 구워 주시면 맛있게 먹는 아들의 모습을 미소 지으며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그 정다운, 당신께서는 하나도 먹지 않으시며 맛있게 먹는 아들을 사랑이 듬뿍 담긴 얼굴로 보시던 그 정다우셨던 아버지의 모습은 정녕 지금의 시대에서는 볼 수 없이 사라져간 아빠의 모습이었던가?……….

세상에는 아주 많은 아버지(아빠)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다른 모습과 다른 환경을 지녔을 테지만, 공통된 바람을 가졌을 것이다. 아내에게 존중받고 자식들에게는 존경받는 가장이 되는 것, 그 자리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아버지 역할의 중요성은 정도의 차이를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부성(父性)을 온전히 보여주기는 너무 어렵다. 세상은 온통 좋은 아버지, 훌륭한 가장을 요구한다. 좋은 아빠에 대한 지나친 강박을 호소하기도 힘들 정도로 그 역할은 당연시 된다. 누구나 세상의 아빠들은 내 아이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 성공적인 삶의 근원에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비롯해 험난한 세상에서 온전한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자존감은 물론 스트레스에 견디는 힘이나 자신을 통제하는 특별한 의지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한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수 있게 하는 힘은 아버지라는 존재로부터 얻는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여러 사회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양의 의미가 크거나 경제적인 능력만을 요구하는 아버지 상은 이미 과거에 접어든 것 같다.

급격한 사회적, 기술적 변화 앞에서 과거 아버지의 권위는 달라졌다. 가족을 책임지고 생계를 부양하는 가장의 책무는 여전하면서 이제는 자녀의 양육까지 정성을 다 해야 하는 아버지의 어깨는 너무 무거워진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요구하는 자녀 양육은 단순히 아버지 역할이 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버지만이 가질 수 있는 본성에 근거한 새로운 역할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의미한다.

단순한 희생이나 헌신이 아닌 시대가 요구하는 유쾌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얼마전 가까이 지내는 지인들과 만나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한국의 정치 이야기, 세상의 이야기, 가정사 이야기, 자식들 이야기 등등을 소재로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모두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변색된 나이 먹은 세대들이다. 모두가 아들 딸 시집 장가보내고 현업에서도 은퇴하여 평생을 동고동락한 부인과 단둘이서 황혼 길을 손잡고 걸어가고 있는 인생들이다. 한창 대화가 무르익고 이따금 농담도 섞여 나와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어 있을 때다. 이때 곁에 있던 박선생이 한마디를 한다. 그가 하는 말 ‘여러분 우리 남정네들 모두가 개를 한마리씩 키웁시다’ 뜬금없는 그의 말에 나는 생각하기를 ‘아~ 이젠 자식들 다 내보내고 두 늙은이들만 살다보니 적적하고 외로워서 반려견 한마리씩 키워 노후의 삶에 무료함도 없애고 강아지 재롱도 볼 겸, 개와 재미있게 즐기며 살기 위해 그러나보다’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니 그가 하는 말, 옛날에는 이사 갈 때 냉장고를 가져가서 남자(남편)들은 냉장고 문만 꼭 잡고 있으면 함께 갔는데, 요즘은 냉장고를 버리고 가니 개를 꼭 붙들고 있으면 틀림없이 새 집에 함께 이사를 가게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한바탕 웃으며 ‘맞다 맞아 그렇게 해야지…암 암’ 하며 농담조의 댓구를 했지만, 조크(Joke) 치고 뒷맛은 무척이나 씁쓸했다.

어쩌다 우리 남편(애들의 아버지)의 위상이 이렇게 흔들리게 되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느날부터인가 경제권이 흔들리면서 아버지의 존재도 조금씩 흔들렸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오랫동안 생의 전부라 생각했던 아이들이 부모들 삶의 저울에서 내려와 자기들 갈 길을 떠나 갔을때, 그 허전함과 막막함은 부모의 생에 갑작스런 우울증으로 찾아들기도 했다. 그래도 여자들은 보기보다 강해서 이러한 사실들을 꿋꿋이 잘 받아들이는데 유독 남자(아버지)들은 예견된 일들이었는데도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거나 혼자서 많은 생각을 하다가, 어느 때는 세월의 번거로움을 식구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술잔속에 눈물을 감추고, 허전함에 멍 하니 먼 하늘만 무심히 올려다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시름과 뻥 뚫린 가슴을 뒷주머니 속에 쑤셔 넣고 내색하지 않으며 혼자서 홍역을 치룬다. 가끔은 혼자서 외로이 공원의 벤치에 앉아 현실의 고달픔을 달래며 잊기도 한다.

그래도 아버지들은 가장(家長)이라는 이름을 항상 머리와 가슴속에 도장을 찍고 기억하며 커다란 멍에를 어깨에 짊어지더라도 휘청거리며 매일 매일의 생활을 이어간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남자는 한 어머니의 남편으로, 일하는 사람, 돈 벌어오는 기계쯤으로 가족들이 생각해도 그에게는 가정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안식처요 낙원인 것을 가족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어느 때라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우리의 아버지들…… 많은 표현과 여러 말이 없어도 이런 마음을 갖고 계신 우리 아버지들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내야겠다.

사람들은 꽃이(아이들)예쁘다. 잎(엄마)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가족을 위해 땅속 깊이 자신을 낮추고 있어 밖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꽃과 잎이 잘 자라도록 양분을 주는 뿌리(아버지)의 노고를 언제라도 잊지 말아야겠다. 이 땅에 ‘아버지’라는 숭고한 이름으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사랑과 헌신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1990년대 이후,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자들이 짊어져 왔던 불평등 구조는 이제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남은 남성우월주의가 있다면 주로 사회적 관습이지 제도가 아니다.

남자들이 가졌던 가계 계승권이나 절대적 재산 행사권 등도 사문화 된지 오래다. 바람직하고 당연한 변화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여자들의 그것에 비해 남자들의 헌신과 고절함은 별로 회자된 적이 없다는 것도 남은 문제들중의 하나다. 전 근대에서 누렸던 남자들의 권력은 다 해체됐으니 가족에 대한 임무로서, 남자들의 절대적 부양권 또한 온 가족이 나눠지려는 자세가 필요할 터인데, 부양권은 여전히 무한으로 강조되고 있다. 특히 가난의 사슬을 몸 아끼지 않고 혈투를 벌여 끊어낸 장,노년층의 아버지들을 보라. 그들은 오직 우리사회의 온갖 그늘을 만들어낸 독불장군 고집불통의 권위적인 존재의 세대로 불린다. 그런 지적의 전부를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젊은 후세들과 여자들에게 권세를 내준, 그리하여 젊은 세대들과 세월에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한 심정의 쓸쓸한 아버지의 뒷모습은 비애롭기 그지없다.

여자들이 일방적으로 소외되는 가정이 불건강하다면 늙은 아버지가 뒷방 늙은이로 소외되는 가정 또한 불건강하다. 자식들은 무조건 적으로 엄마 편이고 엄마를 따른다.

자식들과 부인, 가족들에게서 외면당하고 혼자서 보이지 않는 고독과 외로움속에 힘든 삶의 거센 물살을 기우뚱대며 헤쳐가는 우리네 아버지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가족의 품속으로 안아드리자.

6월18일은 1년에 한번 맞는 아버지날이다. 이날만이라도 아버지에게 사랑이 담긴 선물을 드리고 좋아하시는 음식이라도 맛있게 드시도록 도와드리자. 어머니도 그렇지만, 아버지도 일년 365일이 아버지날이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62/202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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