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들꽃을 바라보며, 상념(想念)에 젖어….

<김명열칼럼> 들꽃을 바라보며, 상념(想念)에 젖어….

노오랗게 익은 오렌지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따스한 봄 햇살에 노곤한듯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졸고 있는 오후, 평화로운 오렌지 밭 옆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니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피어나 드넓은 들판에는 꽃으로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의 미소로 얼굴을 간지럽힌다. 길가 풀섶 자락에 오롯이 고개를 들고 피어난 들꽃을 보며 상념의 늪 속으로 빠져든다.

지금으로부터 1억4천만년전 어느날 아침, 태양이 떠오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아침햇살을 받으며 한송이 꽃이 피어났다. 지구라는 행성 최초의 꽃이다. 이미 수백만년전부터 이 행성에는 초목이 무성했지만, 이 최초의 개화(開花)는 식물이라는 생명체의 획기적인 진화와 변화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최초의 꽃은 아마도 그리 오래 피어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에도 꽃은 여전히 매우 드문 특수한 현상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꽃들이 곳곳에 피어나기위한 조건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날 식물의 진화는 결정적인 선을 넘었고, 갑자기 지구의 모든 장소에 색채와 향기가 폭발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다시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는 섬세하고 향기로운 존재는 다른 종의 의식진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점점 더 꽃에 이끌리고 매혹되었다. 인류의 의식이 진화함에 따라 꽃은 실용적인 목적과 관계없이, 즉 어떤식으로든 생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 가치를 인정한 최초의 대상이 되었다.

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술가, 시인, 문학가, 그리고 신비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예수님은 꽃에 대해 명상하고 꽃으로부터 삶을 사는 법을 배우라고 말했다. 붓다 (부처)는 어느날 제자들 앞에서 꽃한송이를 들어 그것을 바라보며 ‘침묵의 법문’을 했다고 전해진다. 잠시 후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 한사람, 마하가섭이라 불리는 승려가 홀로 미소를 지었다. 그만이 붓다가 준 침묵의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미소 즉 깨달음은 그 후 스물여덟명의 스승들에 의해 차례로 전수되었고, 먼 훗날 선(禪)의 기원이 되었다. 그것이 아무리 짧은 순간일지라도 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함으로써 인류는 자신의 진정한 본질에, 자신의 내밀한 존재의 핵심인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아름다움에 대한 최초의 알아봄은 인간의식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그 알아봄과 연결된 느낌이 기쁨과 사랑이다. 그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는 중에도 꽃은 우리 내면에 있는 가장 고고하고 성스러운 것, 궁극적으로는 형상을 초월한 것의 표현이 되었다. 식물에서 솟아나왔지만 식물보다 더 덧없고, 더 여리며, 더 섬세한 꽃은 다른 영역에서 온 메신저, 물질적인 형상의 세계와 형상 없는 세계를 잇는 다리와 같은 것이 되었다.

꽃은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섬세하고 기분 좋은 향기가 있을뿐 아니라 영적인 세계의 향기도 전해주었다. 좀더 넓은 의미로 ‘깨달음’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꽃을 식물의 깨달음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식물들의 95%는 꽃식물이다. 꽃식물은 지구상에 가장먼저 등장한 광고업자다. 향기를 뿜고 색깔로 유혹한다. 꽃이 광고하는 상품은 자신들의 생식기이다. 숫술은 꽃가루를 갖고 있다. 암술은 씨방을 품고 있다. 화려한 꽃잎과 꿀의 유혹을 받은 벌이나 나비가 숫술의 꽃가루를 몸에 묻혀 다른 꽃의 암술에 꽃가루를 퍼나르면서 수정이 이루어진다. 꽃잎은 중요하지 않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꽃은 화려한 꽃잎으로 대표되지만, 사실은 꽃잎에 가려진 숫술과 암술이 주된 기관이다. 처음 앞서도 언급했듯이, 꽃 식물의 유래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윈도 꽃 식물에 대해 연구를 한바 있는데, 그는 꽃식물의 유래를 ‘지긋 지긋한 수수께끼’라고 말했다. 그만큼 어려운 과제라는 이야기다. 학자들은 꽃의 탄생은 생식의 효율화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줄기가 줄어들면서 여러장의 잎이 모여 한장의 꽃을 만들었다고 본다. 이 가설을 입증한 지금까지 확인된 최초의 꽃은 중국에서 발견됐다. 중국 지린대학교 고식물학자 쑨거 교수가 쥐라기 화석에서 발견한 ‘알케프룩트스’라는 식물의 화석이 그것이다. 이 식물은 몇갈래의 줄기에 어긋난 여러장의 잎이 달린 형태다. 연대 측정결과 약 1억4천만년전 경으로 밝혀졌다.

봄이 되어 꽁꽁 얼었던 동토(凍土)의 땅이 따듯한 햇볕에 녹아 풀리면서 부드러운 흙을 뚫고 나온 각종 봄의 꽃들이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기분을 상쾌하게 전환 시켜준다. 우리는 해마다 봄이 되면 향기로운 꽃 축제장으로 발길을 향하고, 생일이나 무슨 기념일, 그리고 이벤트 행사가 벌어지면 화사한 꽃다발로 주위를 장식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의미 있는 꽃을 사서 선물해주며 사랑을 확인한다.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꽃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채 바라보거나 향기로운 꽃향기에 취해보기도 한다. 왜 우리는 꽃을 보면 매혹을 당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 해보면 막상 우리가 꽃에 대해 알고있는 지식이라고는 장미나 튤립, 백합, 매화, 진달래 등등 그리 많지 않은 몇 종류의 이름이 전부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적어도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어떤 시간을 거쳐 우리에게 왔으며, 인류의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그토록 우리들에게 큰 기쁨을 주는 꽃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생각된다.

인류는 역사가 기록되기 전부터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꽃을 이용해왔다. 인류의 조상 유인원은 잡식성이어서 꽃과 열매를 먹었다. 우리들이 단맛에 대한 기호는 바로 꽃을 열매로 먹던 조상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흙을 파는 연장이 개발된 이후에는 원예가 이루어졌고, 곡물을 가꾸기 쉽게 줄지어 심기 시작하면서 정원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그 향과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화훼재배가 발전하면서 꽃을 단순히 관상용으로 즐기는 것은 물론, 기쁨을 나누고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향신료를 첨가하기도 했다. 때때로 꽃은 치유와 건강을 위해 이용되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 사원의 승려들은 값비싼 사프란 섬유질을 쓴 맛이 나는 위장약으로 사용하거나 습포제로 붙였다. 크레오파트라는 미용을 위해 목욕물에 사프란을 넣기도 하고, 남자들과의 쾌락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먹기도 했다. 중국의 여성들은 암과 당뇨병을 예방하기 위해 중국남부의 중추절 기간에 국화와 달콤한 목서의 꽃을 녹차 잎과 섞어서 마셨다. 뿐만 아니라 미묘한 향기들을 결합해 값비싼 향수를 만들기도 했고, 씨를 둘러싸고 있는 섬유질은 직물의 소재로 쓰기도 했다. 나아가 꽃은 오래전부터 화가, 작가, 사진가,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오늘날 까지도 책, 그림, 조각, 광고 등에서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는 꽃은 밝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과 더불어 우리의 과거를 대변하기도 한다.

우리는 시각과 후각을 통해 꽃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사람들이 꽃에서 받는 느낌은 시각, 즉 색상의 감각이 먼저인 경우가 많다. 꽃의 시각적 효과는 컬러 세러피 효과라고도 하는데,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는 색이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색이 된다. 빨간색은 체온과 혈압을 상승시키고, 기력을 주며, 노란색과 주황색은 건강과 의욕을 주고, 초록색과 파란색 계통은 차분함과 평안함을 준다. 후각을 통해 전해지는 꽃향기 역시 우리에게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어 아로마 오일, 향수 등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또한 사람들은 꽃에 여러 생각과 의미를 담아 표현해왔다. 자신이나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소망할 때나, 지금 여기에 없는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기억할 때처럼 꽃은 생명과 사랑의 상징으로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는데 도움을 준다. 이렇듯 우리는 꽃이라는 존재에 매력적인 감성을 느끼고 , 다양한 꽃이 주는 아름다움과 향기 등에 매료되어 장식, 의상, 조경, 디자인, 심지어 음식에까지 활용하고 있다. 꽃의 매력은 사람의 소유욕까지도 자극한다. 자신만의 꽃밭이나 베란다

정원을 가꾸거나 산과 들로 나아가 남들과는 다른 예쁜 꽃을 찾아다니며 자연에서 직접 꽃의 매력에 흠뻑 빠지기도 한다. 이렇듯 꽃의 생물학적인 요소들은 결국 사람의 본능을 움직이는 감정선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꽃을 감상하고 가까이 하게 된 것이 아닐까.

꽃은 늘 우리에게 가까이 존재해왔다. 굳이 높은 산이나 심신산골까지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주변에서 야생의 꽃들을 볼 수 있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 동네의 공원, 학교, 정원등 여러곳에서 스스로 자라나고 또한 사람에게 길러지며 사랑받고 있다. 3,4월은 봄이라고 하지만, 시카고나 미네소타주의 북쪽 지역은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옷깃 속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차기만하다고 한다. 모든 이들에게 봄처럼 온화하고 따듯한 나날이 이어지길 빌어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이 힘들어 신음조차 나오지 않을 때, 수줍게 핀 작은 꽃을 찾아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지혜가 아닐까 한다.

꽃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쌓였던 근심, 걱정, 분노가 잦아들고 소박한 기쁨에 그것이 자연이 주는 작은 행복이라고 본다. 앞으로 더워지기 시작하면 장맛비에 태풍이 불어올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는 야생초, 풀잎처럼 몸을 굽히고 삶의 자세를 겸손의 자세로 바꿔야겠다는 바램이다.

나 자신을 낮추지 못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면 결국은 태풍 앞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 발아래 들꽃을 보기위해 고개는 숙이지만 마음의 고개는 숙이지 않았던 교만도 이제 언제 어디서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서있는 자리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난다고 생각한다. 일평생을 살다보면 젊고 패기에 찬 봄과 여름이 있고 자신의 열매를 거두는 가을이 있으며 삶을 정리하고 안식을 얻는 겨울이 있다. 삶 속에서 조용히 찾아드는 겨울의 찬 냉기를 보내고 따듯한 감사와 사랑으로 덮어주는 포근한 봄의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서 내 마음도 정리를 해본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03/20220316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