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 이야기

<김명열칼럼>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 이야기

일제시대 시인 백석은 천재적인 재능과 훤칠한 외모로 당시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가 길을 가면 여인들이 자지러졌을 정도라고 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인, 기생 김영한과의 러브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이나 가슴이 찡하고 아려온다.

백석은 함흥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1936년, 회식자리에 나갔다가 기생 김영한을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잘 생긴 로맨스리스트 시인은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는 손을 잡고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 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백석은 이백의 시구에 나오는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김영한에게 지어줬다고 한다. 그렇게 둘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져 연인사이가 된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장애물이 등장한다. 유학파에 당대 최고의 직장인 함흥 영생여고 영어선생이었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켜 둘의 사랑을 갈라놓으려 한다. 백석은 결혼 첫날밤에 그의 연인 ‘자야’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렇지만 자야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이 혹여 백석의 장래에 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염려로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자야가 자신을 찾아 만주로 올 것을 확신하며 먼저 만주로 떠난다.

만주에서 홀로된 백석은 자야를 그리워하며 그 유명한 시(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짓는다. 그러나 잠시 동안이라고 믿었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된다. 해방이 되고 백석은 자야를 찾아 만주에서 함흥으로 갔지만 자야는 이미 서울로 떠나버렸다. 그후 38선이 그어지고 6.25가 터지면서 둘은 각각 남과 북으로 갈라져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후 백석은 평생 자야를 그리워하며 홀로 살다가 북에서 1996년 사망하게 된다. 남한에 혼자 남겨진 자야(김영한)는 대한민국의 3대 요정중 하나인 대원각을 세워 엄청난 재력가로 성장한다. 훗날 자야는 당시 싯가 1천억원(현 싯가로 5천억원)상당의 대원각을 조건 없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를 한다. 그 대원각이 바로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 길상사(吉祥寺)이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했던 자야는 폐암으로 1999년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떠나기 전 1000억 상당의 재산을 기부했는데 “아깝지 않나?” 라는 기자의 질문에 자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1000억 재산이 그 사람의 시(詩) 한줄 만도 못해, 내가 죽으면 화장을해서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 고 하였다니 백석의 시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게 돌아가고 싶었나보다.

과거 지난날 한국의 3대 요정으로는 삼청각, 선운각, 대원각이 있었다. 여기서 잠시 3대요정의 이야기를 곁들여 설명 드리도록 하겠다. <삼청각>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2년 개장했다. 특징으로는 7.4 남북 공동성명 만찬장이었고 1970년대 남북적십자 회담 장소이기도 했다. <선운각> 강북구 우이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67년에 개장했다. 특징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 부장의 내연의 처, 장정이가 운영한 최고급 요정이다. <대원각>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개장은 1951년에 문을 열었으며 한국 요정업계의 원조격이다. 특징으로는 70~90년대 권력자들의 밤정치의 무대, 한국 요정 정치의 근거지이다.

이어서 자야(김영한)가 운영한 대원각에 대한 옛날 야기다.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사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알려진 길상사, 그 설립 비화가 너무나도 특이하여 그런듯 하다. 원래 이곳은 우리나라 3대요정중 하나였던 대원각으로, 삼청각, 선운각과 더불어 가장 유명세를 탄 곳이다. 7천여평의 대지에 40동의 건물을 자랑하며 한때 군사정권 밀실정치의 본산이기도 하였던 이곳, 각종 부정과 야합, 등으로 얼룩진 밀실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 엄청난 규모의 주인이자 아픈 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김영한 님…….. 노년에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스님을 친견한 뒤 대원각을 시주할 뜻을 비췄고, 10년 넘게 사양한 법정스님께 줄기차게 거듭 받아주시기를 청하여 1995년 그 뜻을 이루게 된다.

서울에서 태어나 몰락한 집안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자 스스로 한성기생이 되어 진향(眞香)이라는 이름으로 가곡과 궁중무를 배워 두각을 나타냈고, 잡지에 수필을 발표하며 예쁜 미모에 시와 글, 그림, 춤, 노래 등 다재다능한 기생으로 명성이 자자한 장안의 일류급 기생이었다. 한때 일본유학을 가, 신 여성의 길을 준비하였으나 스승 신윤국의 투옥소식을 듣고 다시 함흥으로 돌아와 그를 면회했으나 면회를 거절당하고 다시 기생생활을 하면서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으로 사랑을 알게 된 그녀는, 백석집안의 반대로 사랑을 이룰 수 없었고 백석은 만주로, 그녀는 서울로 헤어지게 된다. 그 이후 그녀는 서울에서 성공을 거듭해 당대의 대원각을 운영, 1997년 백석을 기리는 뜻에서 2억원을 출현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고 같은 해 법정스님께 대원각을 시주, 길상사(吉祥寺)를 건립하게 된다.

1997년 12월14일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도 참석하고, 이날 법정스님은 개원사에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도량,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님께 ‘길상화’란 법명을 주고 108염주를 목에 걸어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일군 이 터에 부처님을 모셔 기쁘다며 이곳이 시민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어 그들 모두가 고뇌의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렇게 길상사는 많은 여인들이 술과 웃음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던 곳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참선하는 수행의 도장으로 그 모습을 탈바꿈하게 되었다. 생각을 바꾸면 그 쓰임새도 바뀌는 산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제 이곳은 대원각을 시주한 길상화인 김영한님도, 그 시주를 받아 길상사를 설립한 법정스님도 이곳, 아니 이 세상에는 없다. 길상사 창건을 주도한 1세대들은 이미 열반하였고 오늘도 조용히 침묵 수행을 하는 신자와 스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아름답고 애잔한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세인들의 기억속에 남아 이어질듯 하다.

참고로 이어서 1960~80년대 초반까지 밤의 세계를 주름잡았던 ‘요정 정치’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70~80년대 한국에서 밤의 세계를 주름잡던 ‘요정정치’를 두고 자주 인용되던 문구이다. 요정(料亭)은 접대부를 고용해 고급요리와 술을 파는 고급 유흥업소였다. 오늘날 현대의 룸싸롱의 원조격으로 1960~1980년대만 해도 정치인, 고위관리, 재벌, 군인 등이 모여 은밀한 대화와 각종 뒷거래를 했던 ‘밀실정치’의 상징이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밤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요정에서 나라의 운명적인 일들이 결정됐다. 특히 7.4 남북공동성명 만찬장, 남북적십자 회담장 등으로 사용되면서 국제회담의 비밀장소로 유명해진 곳이 바로 삼청각이었다. 서울의 3대요정으로 꼽혔던 삼청각, 대원각, 오진암(사람에 따라 선운각 또는 오진암 대신 청운동에 있었던 청운각을 3대요정으로 꼽기도 한다) 은 당시 권력 실세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과거 중앙정보부 요원이 저술한 책 ‘산자여 말하라. 2001년 발행’에 의하면 중앙정보부가 아예 요정의 정보를 총괄 수집, 관리하는 미림(美林)이라는 팀을 만들어 운영했을 정도로 권력과 밤의 세계는 너무나 가까웠다.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요정 정치는 사회적인 문제가 됐다. 당시 요정정치에 대한 국민의 반감은 엄청났다. 요정정치가 안고 있는 비밀거래, 공직기강 해이와 풍기문란, 축첩문제, 등이 연일 도마위에 오르자 여성단체들은 들고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가운데 당시 최고 요정이었던 선운각 등에서 일하던 정인숙이라는 접대부가 총에 맞아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해 대한민국을 벌컥 뒤집어놓았다. 일명 ‘정인숙 피살사건’ 을 계기로 ‘요정정치’는 국가적인 논란거리로 부상했고, 이후 요정은 쇠퇴기를 걸었다.

요정도 시대 분위기가 바뀌면서 대부분의 전통음식점으로 변했다. 요정 정치의 산실이었던 대원각, 삼청각도 1990년대 말에 이르러 폐쇄됐다. 대원각은 이미 앞서도 얘기했듯이 90년대에 사찰로 재탄생했다.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진 여주인은 법정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대원각을 송광사에 기증했다. 법정스님이 나중에 여주인의 법명인 “길상화”를 따서 “길상사” 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 최초의 근대 요정인 오진암은 2010년 부동산 개발회사에 매각돼 호텔이 들어서기로 했다. 그러나 한옥의 가치와 역사성에 주목한 종로구가 개발회사를 설득해 호텔 대신 ‘전통 문화공간, 무계원’으로 탈바꿈 시켰다.

결론적 이야기로 삼청각, 대원각, 청운각 등은 주변의 소나무 숲도 고고히 자태를 뽐내며 기개를 자랑했고, 계곡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은 청정수처럼 맑고 깨끗했는데, 유독 그 곁에 자리 잡고 있는 요정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타락해지고 오염된 더러운 몸으로 시궁창 냄새가 났고 불결했다. 곁에서 흐르는 계곡 물은, 산도 푸르고 맑으며 물 역시 청정수처럼 맑디 맑은데, 사람들의 마음은 구정물처럼 혼탁하고 썪어서 냄새가 나고 악취가 풍겼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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