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기자의이스라엘,요르단성지순례기행문18

김명열기자의이스라엘,요르단성지순례기행문18

광야와 사막(유대 광야)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특이하게 느낀 점은, 광활한 사막과 같은 벌거숭이 민둥산으로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국토의 거의 대부분이 광야로 이루어져 있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광야는 어느 곳에나 펼쳐져 있다. 오늘은 이러한 광야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광야와 사막은 우리에게 준비된 시련이자 동시에 도약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광야는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을 의미한다. 유사한 말로 황야는 버려두어 거친 들판으로 개간되지 않은 황량한 벌판을 말한다.

지형적으로 험하고 척박하여 생물이 거의 없는 광야는 공간적 제약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늘 중요한 도전과 깨달음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성경에서의 광야는 주로 위대한 선지자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만나거나 중요한 결단과 깨달음의 장소, 혹은 연단을 받은 공간으로 알려졌다. 강수량이 적어서 식물과 생물이 보이지 않거나 적고, 인간의 활동도 제약되는 지역인 사막은 그 생긴 이유에 따라 열대사막, 해안사막, 내륙사막, 한랭지 사막으로 나눈다. 사막은 광야나 황야와 유사한 의미로 쓰이나 실제는 더 생물이 살기 힘든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광야란 시를 쓴 이육사는 독립운동으로 체포와 옥고를 치르며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수인번호가 64번으로 육사라고 불려지게 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민족을, 민족혼을 불러일으키고 시인 정신을 넘어 투사였을 정도로 그 조국과 민족혼을 깨운 시인으로 평가된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지 목하였으리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서,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성경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며 하나님 말씀을 받고 새로운 민족으로 빚어지는 과정이 나온다. 다윗도 사울왕의 공격을 피해 네게브 사막과 광야에서 동굴을 헤매고 다녔다.

사막은 광야보다 더 치열한 생과 사의 공간이다.

청마 유치환은 ‘생명의 서’에서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고 한다.

때로 우리는 생의 여러 고비에서 광야와 사막을 만나게 된다. 내려 쬐는 태양과 타는 목마름과 배고픔과 외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거친 광야를 달리고 강한 잡초에 걸려 넘어지고, 웅덩이와 바위틈새를 기어가야 하는 시간들이 있다.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며 광야에서 사명과 공생애를 출발하시며 사탄의 세가지 유혹을 물리쳤다. 광야는 연단과 시련이나 동시에 도전과 비상의 기회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가는 길에서 큰 빛과 주님의 음성으로 인해 눈이 멀고 낙마한 장소가 바로 그곳이다. 바울의 본격적인 신앙수련의 장소는 바로 주님을 만난 후 다메섹에서 나와 은둔했던 아라비아 사막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은 다메섹으로 갔으며, 그가 비록 주 예수를 만나 거듭났으나 다메섹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행9:21).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의심받고, 두려운 마음으로 회피하는 인물이었다. 옛 동료였던 유대교인들에게는 배신자로서 암살의 대상이 되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구사일생으로 그 성을 몰래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바을은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엡3:16)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었다고 증언하며, 거기서 주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체험을 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심과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하나님의 의지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을 받을자 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구원을 얻은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다.

이후 바울은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고 힘있게 증거하며 이 복음을 확신하며 전하는 곳에 하나님의 온갖 권능과 이적이 나타났다고 바울은 고백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는 바울이 천국까지 가본 신비한 체험을 고백하는데 그 체험이 아라비아 사막에서의 은둔 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광야와 사막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만나면 우리에게 준비된 시련이자 동시에 도약의 기회임을 조용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몇년전 강원룡 목사님이 한 기자와의 대담에서 “선생님은 역사에서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란 말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기억되고 싶다”고 한 것이 기억난다. 흡사 석청과 메뚜기를 먹고 시대를 깨우던 세례 요한처럼 기억되기를 원하던 것이라 생각된다. 오늘의 삶은 힘들고 거칠고 메마르다. 그 속에 숨은 뜻과 감추어진 비밀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겠다.

유대 광야

유대광야는 유대 언덕과 요르단 열곡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서 길이가 약 96km, 폭이 16Km정도가 되며 V자 형태를 이룬다. 유대광야의 북쪽 경계는 여리고 북쪽 9Km지점이고 남쪽경계는 사해 남부 정도로서 직사각형 형태의 지역이라고 보면 된다. 유대광야의 서쪽경계인 유대 언덕의 높이는 대략 750~919m 에 달하는 반면 동쪽 경계인 열곡중에서 가장 낮은 지역인 사해는 해수면 아래 400m 이므로 유대광야의 고도 차이는 약 1100~1300m에 이른다. 강수량을 비교해 보면 유대광야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유대 언덕의 강수량은 355~711mm인 반면, 열곡으로 내려가면서 서서히 줄어들어 사해의 강수량은 100mm도 채 되지 않는다. 유대광야의 절반이 넘는 지역의 연평균 강수량은 200mm를 넘지 않는다.

고도와 강수량의 차이로 인해서 예루살렘과 유대광야의 지리적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가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감란산을 넘어야 하는데, 감란산 정상을 넘어서 동쪽으로 향하면 지형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산하나 사이로 예루살렘이 있는 서쪽과 여리고로 향하는 동쪽간에 지형적 분위기가 그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광야가 미디어를 통해서 보게 되는 사막 예를 들자면 ‘사하라 사막’ 처럼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지역도 아니다. 땅은 매우 딱딱해서 ‘지질학적으로 세노니아 백악질이라고 부른다’. 물이 흡수되지 않아 비가 오면 그대로 유거수가 되어 와디(Wadi=비가 오지 않으면 완전히 바짝 말라버리는 하천을 말한다)를 형성한다. 그래서 유대광야는 고지, 둥근 언덕, 극적인 벼랑, 깊은 협곡, 낭떠러지 등이 많다.

비가 내리는 우기인 겨울이 되면 풀이 난다. 물론 우리의 우기(여름)처럼 온통 초록색은 아니지만 말이다. 반대로 비가 오지 않는 건기인 여름에는 풀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어느때는 건기인 6~7월에 40일간 비가오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목자들은 우기인 겨울에 양과 염소를 이끌고 유대광야에 가서 먹인다. 이처럼 비가 드믈기 때문에 베두인들이 천막생활을 하면서 목축업을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살기가 어렵다. 고대에는 생존을 위해서 수조(물탱크)를 만들어 물을 모았지만, 요즘에는 양과 염소를 키우는 베두인들도 물탱크를 마련해서 물을 공급받고 있다. 사람들이 거주하기 어려운 지역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대 광야는 도피처 역할을 했다. 다윗은 사울의 핍박을 피해 이 광야로 도망쳤다.(삼상22:1~27:6). 사해 사본으로 유명해진 에세네파는 유대교가 타락했다고 생각해서 고립된 생활을 했는데, 그들의 거주지 또한 유대광야, 특별히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이었다. 매우 메마른 지역이기 때문에 양피지에 히브리어 성경을 기록한 사해 사본이 수천년의 세월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유대광야는 빈들(눅1:80) 광야(마4:1)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유대광야가 눈길을 끄는 것은 세례 요한이 그곳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쳤으며(마3:1~2)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이다.(마4:1)

첫째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즉 온갖 열매나 먹을 것이 풍족한 지상의 낙원에서 뱀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은 반면,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황량하고 메마르며 뜨거운 유대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세가지 시험을 받으셨지만, 말씀을 통해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다음 호에는 성서에 나오는 유대광야 나무들에 대하여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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