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세상의 고통과 행복

<김명열칼럼>  세상의 고통과 행복

 

평소에 가깝게 지내며 잘 아는 지인 한분이 계신다. 이분께서는 몇 년 전에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2년전에는 부인마저 몹쓸병(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50대초반의 젊은 나이에 운영하던 사업체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아 손을 털고 이제는 백수가 되어 한숨과 고통속에 세월을 보내고 있다. 거기에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다리마저 관절염과 당뇨병이 생겨서 육신의 고통역시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 사람의 말인즉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 차라리 더 나으며, 이러한 힘들고 어려운 고통과 고난이 왜 자기에게만 닥쳤는지 세상이 원망스럽다고까지 했다. 불과 5~6년전만 해도 그는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고 부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의 절정으로 예표되는 결혼식을 행복으로, 슬픔과 아픔의 절정인 장례식을 고통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각각 하객과 조문객이란 객체로, 언젠가는 주체로 서있게 될 것이다.

상반적인 두 식에 우리가 웃고 울듯 행복과 고통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들곁에서 상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행복을 바라보는 기준과 잣대,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일한 생각을 한다. 그러나 고통은 그 반대이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카레리나를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행복한 가정은 그이유가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가 있다’ 행복은 대부분 유사하지만 불행과 고통은 저마다 의미와 무게가 너무나 다르다. 우리는 자문자답을 고통에 관해 자주한다. ‘왜? 나에게만! 왜? 너에게 이런 고통과 불행이 존재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세상의 많은 슬픔과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별과 상실, 전쟁과 학살, 가난과 불평등, 차별과 배제, 격리와 고독, 무시와 멸시, 실패와 파산, 환멸과 좌절, 실업과 실연, 실망과 절망, 죄의식과 열등감, 박탈감과 피해의식 등등, 이외에도 그 고통의 종류와 실태는 너무나 많이 있고 그러한 상황과 체험은 우리가 생활을 하고 있는 곳곳에 널려있다. 정신적인 고통, 신체적인 고통, 물질적 결핍에서 오는 고통,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통 등, 고통의 기원도 다양하다.

세상속에 귀를 귀울여 보면 명랑하고 행복한 웃음소리 뒤에는 보이지 않게 처절한 고통의 신음이 들리는듯 하다. 행복보다는 불행, 기쁨이나 즐거움보다는 역경과 고통이 많은것이 세상의 현실이고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며 이치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의 인생을 “고해”라고도 말한다. 즉 인생은 괴로움이 가득한 바다와 같다는 말이다. 온갖 괴로움과 근심 걱정으로 가득한 것이 인생이라고 할수 있겠다.

사람은 옛날부터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힘들고 고달픈 삶을 겪으며 살아간다. 예날 중국의 이상시대라고 하는 “요순”시대에도 병이 있었고 장애인도 있었으며 고아도 있었다. 그밖에 어렵고 힘들고 불쌍한 경우들이 많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전성시대라 할수있는 다윗왕의

시대에도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은 역시 어려웠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내게 되어있다. ‘인생견금생활난’ 즉 이 뜻의 말은 우리의 생명이란 영원한 시간과 공간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이세상에서 잠시 누리는 것이다. 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생존경쟁속에 투쟁하고 빼앗고 뺏기며 힘들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으며 어렵게 살아가는데, 우리는 언젠가는 죽어야할 생명인 아(자아)를 벗어나 영원한 얼나(영적인 나)로 거듭나야 한다.

공자(BC551~479)는 평생을 힘들고 어렵게 살았다. 무당인 어머니 안징재는 자기보다 쉰두살이나 많은 숙양홀의 첩이었다. 그나마 3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본처인 식씨에게 쫓겨나 곡부로 옮겨가 살았다. 공자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3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때 어머니를 여의였으며 19살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으나 부인은 도망을 갔다. 이복형인 맹피는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다. 먹고 살기위해 창고지기, 소, 양치기 등 온갖 험한 일을 다하며 살았다. 요즘말로 표현하자면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다가 51세에 처음으로 벼슬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공자는 당시 왕족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정치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당하고 갈등을 빚다 벼슬을 그만뒀다.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그러나 공자가 공직에 재임하던 기간은 고작 4년에 불과했다. 정치적 포부도 좌절된 것이다. 이후 14년 동안이나 이나라 저나라를 방황하다가 노나라로 되돌아 온것이 그의 나이 68세때였다. 아끼던 제자 안회를 그의 나이 70세에 잃었고, 평생의 호위무사였던 아홉살 어린 “자로”는 과워에 의해 젓갈로 담가졌다. 그 충격으로 공자는 이듬해 공자의 나이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공자의 위대함은 현실에서의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도를 닦고 덕을 세우다가 곤궁에 빠진다 해도 절의를 바꾸지 않는 것이다.” 라고 했고, 또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라고 한 말에서 보듯이 매일 매일을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자의 논어는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의 생활은 비록 곤궁하였지만 근면하고 열정적으로 학문을 닦았었다. 모르는게 있으면 누구에게라도 배움을 요청했다. 그의 삶은 역경을 헤치고 살아온 인간승리이며 고난속에서도 그가 지키고자 했던 인간의 도리들은 아직도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가르침이 되고 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그의 말씀처럼 생활이 힘들 때 마다 논어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되새기며 제대로 이해하고 적절하게 현대에 적용한다면 충분히 우리 삶의 나침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 지으며 하고 싶은 말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말씀중에 “낙생여고”, 즉 즐거움을 만드는 산실은 고통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고통과 어려움은 다가올 즐거움과 행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고, 고통은 즐거움에 빠져있을 때 나타나는 것이며 안락과 즐거움은 다가올 고통의 씨가 되는 것이다라는 논리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도 있다. “고진감래”, 이뜻은 고통이 끝나면 달콤함이 온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걸로 보아 지금 겪고 있는 고생은 곧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어려움과 역경을 딛고 일어나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본다. 지금 고통을 겪고 있다면 결코 포기하지 말고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견디어 진정한 행복을 맛봐야겠다.

세상의 이치는 정말로 공평하여, 내려가는 길이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가 있고, 불행이 닥치면 언젠가는 반드시 행복이 찾아온다는 진리와 이치이다.

흐리고 비오는날이 있으면 반드시 그 후에는 밝은 태양빛이 비치는 맑은날이 오듯이, 현재의 힘들고 어려운 역경과 고통을 참고 견디면 어김없이 좋은날, 행복한 날이 찾아올 것이다. 지금 어렵고 힘든 고통상황에 있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를 버리지 말고 굳센 신념과 믿음으로 기다리면 꼭 틀림없이 좋 고 행복한 날이 찾아올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며 마음속으로 축원을 드린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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