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기행문> 동유럽 6개국 여행 기행문 (4)
독일의 산업 및 경제
교통의 중심도시 프랑크푸르트 구 시가지(Altstadt) 에는 80년대 초 복원한 중세, 르네상스풍의 시 청사, 그 주위의 유서 깊은 저택들이 유명하다. 지금도 구 시가지의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마인강 건너편에 있는 슈테델 미술관 역시 이곳에 온다면 들러볼만한 곳이다. 런던이나 파리의 거대한 미술관보다는 작지만 의외로 중세기부터 현대미술까지의 방대한 소장품을 자랑한다. 시내 중앙의 바로크풍의 건물인 중앙경비초소를 기준으로 건물들의 스타일이 다르다. 중앙경비초소의 뒷편 괴테거리는 루이뷔통, 지미추, 프라다, 에르메스 등의 고급 뷰티크의 상점들이 있다. 중앙경비초소 앞쪽에는 백화점, H&M, 자라 풋 락커, 에스프리처럼 현대적인 가게들이 있다. 최근에 새로 생긴 MYzeil에는 홀리스터 매장도 있는데, 어쨌거나 이 도시에 관광을 온다면 이곳에 들러 선물을 사고 고급상품들도 구경할 수 있다.
한편 이 도시는 2006년 FIFA월드컵 축구대회의 개최지중 한곳이기도 했다. 발트 슈타디움에서 한국 이천수의 프리킥과 안정환의 중거리 슛 등에 힘입어 토고 대표팀을 2:1로 격파하여, 프랑크푸르트는 대한민국이 월드컵 도전 역사상 최초로 해외에서 첫 승리를 이룩한 도시로 남게 되었다. 현재 프랑크푸르트에는 약 70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50여만개의 일자리가 있고, 매일매일 30여만명의 유동인구가 도시를 오가는 활기찬 도시이다. 매년 2백만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이 도시를 찾아오며, 나 역시 그중의 한 사람으로 이곳을 찾아 관광을 즐기고 쇼핑도 하며 맛있는 음식과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전통성을 띈 흑맥주도 마셔보고 그린 와인도 맛보았다.
흑맥주가 어떤 맛인지? 그린 와인이 어떤 것이며 어떤 맛인지는 시음을 해보지 않고서는 그 맛과 품질을 평가할 수 없기에 마셔보았다. 상세하고 재미난 이야기들은 앞으로 계속 기행문을 이어가며 들려드리도록 하겠다. 여행에서 필요한 덕목들은 개인적으로 관찰(보고 살피며)과 사고(생각하고 감상하는 것)라고 대개들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이상의 두 가지를 충족시키려면 몇가지가 필요한데, 그것은 자기만의 시각과 용기, 그리고 여유이다. 이것들이 적당한 조화와 융합을 이룬다면 그 여행은 보다 즐겁고 보람된 여행이 될 수 있다. 보는 시각은 각자가 지니고 있지만, 여유와 용기는 자신이 만들어야 할 사항이다. 나는 이번의 여행에서 그러한 부분의 장점을 살려 독자들과 함께 최대한의 공감과 지식을 얻고 정보를 얻
는 유익하고 알찬 내용의 소재를 곁들여 글을 이어갈 예정이다.
처음에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독일은 우리나라와 옛부터 아주 밀접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설명을 드렸다. 우리나라와 독일의 첫 만남은 옛날 조선시대 때에 이루어졌다. 양국의 비공식 접촉은 1866년 2월 충청남도 아산만 해미현 조금포에서 이루어졌고, 공식적인 첫 교섭은 1870년 5월 부산의 왜관에서 이루어졌다. 해미현의 조금포에서는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통상을 요구했던 것으로, 두번 모두 거절되어 후년의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으로, 군함 에르타호를 타고 부산 왜관에 내방한 도쿄주재 독일 대리공사 폰 브란트에 의해 전개되었지만 통상수교거부정책에 좌절되었다.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이 성사되자 독일측은 이를 계기로 청의 도움을 받아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수립코자 하였다. 결국 주 청공사로 전근된 폰 브란트와 주 톈진 독일공사 파올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주 요코하마 독일 총영사 에드워드 잡페의 노력 속에 1883년 11월26일 조~독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1883년 11월28일 독일 총영사관이 서울에 개설되고 젬 바하하가 초대 주한 독일영사로 임명되었으며, 미리 와있던 부들러 부영사와 청국 재상 이홍장에 의해 조선왕국 외무협변으로 임명된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로프등은 한반도 정계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2018년 현재 이로부터 135주년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 양국의 공식적 외교관계는 1955년 12월1일 대한민국정부와 서독정부가 양국을 상호 승인함으로써 재개되었다. 이에 따라 독일은 1956년 봄 영사 인가증을 발급하고 6월5일에 주한독일 총영사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한국 서울에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1957년 6월5일 주미대사 양유찬은 친선 사절로서 서독을 방문하여 콘라드 아데나워 수상과 회담하고 조만간 국교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후 마침내 1958년 8월1일에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켰다. 같은 날 주 독일대사관이 본에 개설되었고 초대 주 서독대사에 군인출신으로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손원일 씨(1958년 8월22일 부임)를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는 퀼른에 있는 총영사관을 폐쇄하고 서독의 본(Bonn)에 대한민국 공사관을 설치하였다. 더불어 이 무렵 제1공화국 시절부터 카톨릭 교회의 중개에 의해 한국인들이 간호사로서 독일에 파견되기 시작했다. 1961년 12월13일 한-독 차관협정, 1962년 2월4일 한-독 경제협력의정서, 1963년 2월14일 한 ․ 독 경제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 등이 체결되어 경제협력관계가 강화되었다.
1963년 12월22일 123명의 한국 광부 제1진이 서독 뒤셀도르프공항에 도착하여 주 서독 최덕신 대사 등의 환영을 받았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1964년 12월6일 독일을 공식 방문하였다.
가난한 나라 한국에 돈(차관)을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에 그 어느 나라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갖은 방해를 무릎 쓰고 정말로 힘들게 1억4천만 마르크를 빌리는데 성공했다. 그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하는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출신 파독광부 500명을 모집하는데 4만6천여명이 몰렸다. 한창 꽃다운 나이 20대 초반의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죽은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몸을 닦았다. 그 가녀린 손으로 하루 종일 닦고 또 닦았다. 서독의 간호사들이 외면을 하고 하기 싫어하는 궂은일들은 모두가 나이어린 한국의 간호사들이 도맡아서 처리했다.
돈을 한푼이라도 더 벌기위해서는 밤, 낮을 가리지 않고 더럽고 무섭고 회피하는 모든 힘든 일들을 나이어린 한국의 간호사들이 해냈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천미터 이상의 깊은 석탄 갱도의 땅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과 사투를 벌이며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사람들에 비해 10여 시간씩 그 깊은 지하갱도에서 석탄을 캐내는 광부 일을 묵묵히 했다. 서독의 신문과 방송, 언론매체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나라 한국에서 온 여자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을 극찬하며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들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쉬지도 않고 일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이름이 바로‘코리안 엔젤’이다. 몇년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정희 대통령이 국빈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 형편상 대통령의 전용기는 상상도할 수 없어서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계약을 체결했지만,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에게는 비행기를 빌려 줄 수 없다는 미국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도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한국으로 보내주었다. 어렵사리 우여곡절 끝에 서독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서는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손을 흔들며 환영해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 코리안 광부 만세 ! 코리안 엔젤 만세 !”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박대통령은 창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히며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옆에 앉아있던 육영수여사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었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에 그들은 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강당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미어져라 몰려들었다. 서고, 앉고, 기대고, 창문에 걸터앉고, 등등 미쳐 강당 안에 들어가지 못한 광부들은 밖의 창가에 모여들어 창문 안을 들여다보며 박정희를 외쳤다. 박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을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눈동자만 반짝거리고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가 없었다. 박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 땅에 와서 땅속 1천미터도 더 되는 뜨거운 지하갱도에서 얼굴을 시커멓게 그을려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서 말이 잘 나오지를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열심히 일……합..시…다…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목이메인 목소리로 박대통령은 감정에 북받쳐 울먹이는 소리로 계속 일하자는 이 말만 반복했다. 가난한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천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들고 고된 일을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강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기다리고 있을 가난한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박대통령내외는 할 말도 잊은 채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소리 내어 눈물을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가 엉엉 울면서 영부인 육영수여사 앞으로 몰려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여사의 옷을 잡고 그분의 옷이 찢어질 정도로 잡고 늘어지며 어린 간호사들은 통곡을 했다. 육여사는 있는 대로 팔을 벌려 간호사들을 끌어안았다. 모두가 눈물로 범벅이 되고, 단상에선 박 대통령은 연설을 다 마치지도 못한 채 광부들에게 둘러싸여 함께 울었다. 석탄가루가 묻어있는 시커먼 작업복의 광부들을 얼싸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박대통령의 하얀 와이셔츠가 금방 새까맣게 석탄가루로 칠해져있었다. 경호원들도 어쩌지를 못하고 곁에 서서 함께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대통령 내외분이 펑펑 눈물을 쏟아 울면서 당신의 자식처럼 한명 한명을 꼬옥 껴 안아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며 말을 잊지 못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 절을 올리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다 .. 하겠습니다” 를 수없이 반복했다. 곁에서 이러한 장면을 처음서부터 보고 있던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다음주에 이어서 계속됨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