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 명화속에 흐르는 복음 3
코시모 로셀리 “홍해를 건넘”
요리하는 것과 설거지 둘 중에 고르라면 당연히 음식 만드는 것을 고르겠습니다. 여러 가지 재료와 양념을 가지고 맛있게 먹는 음식을 창조하는 일은 적성에 맞을 뿐만 아니라 즐겁습니다. 그러나 설거지는 싫습니다. 그릇과 숟가락 그리고 컵과 주걱 등을 하나하나 씻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습니다. 즐겁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필 요즘 들어 설거지를 자주 해야 할 개인적인 사정이 생겼습니다. 하루는 설거지하는데 갑자기 화딱지가 납니다. “아 이놈의 설거지 뭐 이리 많이도 나오나? 한 번도 아니고 매일매일…” 그 순간 들고 있던 접시를 확 집어 던지고 싶었습니다. 하필 새 접시라 아까운 마음에 참았지만. 잠시 후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산 사람 집에서만 설거지가 나온다. 죽은 사람 집엔 설거지가 없잖니. 설거지도 축복이다.” 그 순간 싱크대 물이 홍해 바다처럼 갈라집니다. 내 마음에 불평불만의 파도가 갈라집니다. 홍해의 기적이 설거지는 하던 내 맘에 일어났습니다.
믿음 생활이 꼭 출애굽의 역사와 같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듯했지만 어느새 바로의 추격조가 따라붙습니다. 설상가상 홍해 같은 커다란 인생의 문제들을 맞대하게 됩니다. 예수 믿으면 꽃길 갈 줄 알았는데 돌작길이 나옵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 줄 알았는데 새로운 문제들이 튀어나옵니다. 감자기 집안에 힘들일 생기고, 평일에는 아무 일 없다가 주일날 바쁜 일이 생기고, 부부싸움도 이상하게 주일 아침에 터집니다. 교회까지 어찌어찌해서 나왔는데 교회 주차장에 바로왕 같은 원수들이 나타납니다. 예배 후 친교 시간에 바로들이 여기저기 앉아있습니다. “아이고 이럴 걸 무슨 교회냐? 그냥 옛날에 살던 대로 살자.” 바로의 추격조에 잡혀서 다시 이집트로 끌려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나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뒤로는 바로의 군대가 병거를 거느리고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혀 죽을 판입니다. 이렇게 급박한 순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홍해를 향해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하시면 될 것을 굳이 모세의 손을 빌려서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모세가 할 일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 속에 하나님께서는 알아서 모든 것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대신에 여러분의 손을 들어 지금 당면한 인생의 거대한 문제들을 향하길 원하십니다. 홍해 바다 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닥친 문제와 근심 앞에 포기하고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문제가 생겼을 때 손을 들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주님 제 앞에 놓인 홍해를 열어주시옵소서. 제 마음과 삶을 추격해오는 바로의 군대 같은 문제들을 제압해주십시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사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때 우리는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동풍이 문제의 중심을 가르시고 거기에 마른 길을 내시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코시모 로셀리가 그린 ‘홍해를 건넘’ 이라는 작품을 봅시다. 우선 출애굽 사건을 중세시대의 모습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등장인물의 옷, 군사들의 무기체계, 그리고 성곽의 모습이 중세시대의 모습입니다. 화면에 좌우를 중심으로 극명하게 대조적인 두 세계가 그려져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홍해 바다에 빠져가는 이집트의 군대가 보입니다. 최고의 무기체재와 힘을 가졌던 그들이 힘없이 바다에 수장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일그러져있습니다. 반대로 왼쪽에는 홍해를 건넌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토록 강력했던 바로의 군대가 하나님의 능력에 속수무책으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림의 좌우로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보여줍니다. 오른쪽에는 높은 성곽과 성벽으로 무장한 바로의 왕궁입니다. 그러나 그 위로 검은 먹구름과 우박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재앙을 받아 무너진 세계입니다. 반면에 왼쪽으로는 높은 바위산과 좁은 길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 걸어가야 할 광야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평안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디모데전서 2:8)
손가락으로 지적해봐야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대신에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합니다. 설거지하다가, 일하다가, 생활의 걱정, 돈 걱정, 자식 걱정, 비즈니스 걱정 같은 바로의 추격조들이 쫓아올 때마다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외적인 문제의 홍해를 가르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내적인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 길을 내시는 역사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홍해사건은 복음적 세례를 보여주는 예중적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에 들어갑니다. 그 안에서 이전에 노예가 된 옛사람이 죽었습니다. 홍해 바다를 나올 때 그들은 새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곧 홍해 안에서 죽음, 새 창조, 새 생명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세례가 들어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1-4).
이런 의미에서 초대교회에 관한 고고학적 연구들을 보면 십자가의 모양이나 원형으로 파진 물웅덩이가 발견됩니다. 세례를 받는 자가 땅속으로 들어가 물에 빠져 죽는 것임을 상징합니다. 십자가 모양의 물웅덩이에서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습니다. 엄마의 모태와 양수같은 원형 모양의 물웅덩이에서 세례를 받고 새롭게 태어납니다. 출애굽의 홍해 속에 나타난 복음과 세례입니다.
집안에 전기 스위치를 켜기까지 어둠은 물러가지 않지요. 아무리 발전소에서 우리 집까지 거대한 전기의 힘이 도달해서 준비돼 있어도 이것을 누리는 방법은 내 손으로 스위치를 올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삶에 모든 것을 이미 준비해놓고 계십니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할 것은 믿음의 스위치를 올리는 것입니다. 손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홍해 같은 인생의 문제에서 새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 옛사람이 홍해 바다에 빠져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당신에게 주시는 복음의 축복입니다.
김호진목사 (올랜도 연합감리교회 담임) <10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