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 희생말고 부정하는 것이다.

<김호진목사 / 올랜도 연합감리교회 담임>
“기도는 세상적인 욕심의 발전소가 아니라 소방서이다.” 기도에 관하여 누군가 아주 명쾌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풀어보면 아무리 내 시간과 힘을 쏟아 부어 기도한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시간과 물질과 공을 들여 자기를 희생한다고 하지만 결국에 자기성취를 위한 몸부림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자기 안에 있는 욕심과 헛된 욕망을 인정하고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곧 자기 내려놓음, 자기 부정의 엎드림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희생의 함정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희생했으니 이만큼 이룰 수 있겠다 싶은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곧이어 나만 한 믿음이 어딨겠는가 싶은 자기 의란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자기희생이 아닙니다. 대신에 내가 희생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자기부정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만한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고 십자가 앞에 자기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희생했으니 내가 뭔가를 받을 수 있겠구나 싶은 자기성취는 생각할 수도 없고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겠거니 하는 자기 의가 발붙일 자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기희생을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주일날 놀러 가고 싶지만 희생해서 교회를 가고, 아깝지만 희생해서 십일조와 헌금을 하고, 바쁘지만 희생해서 제자훈련을 받고, 여름이면 희생해서 남미나 아프리카에 가서 힘들게 단기 선교를 하고, 피곤하고 졸리지만 희생해서 새벽기도를 해냅니다. 내가 이만큼 희생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이 상주실 차례입니다. 우리 집에 화를 면하게 하시고 복을 주실 거라 믿습니다. 이만큼 희생했으니 내 믿음이 좋은 것이라 내심 흐뭇하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이 정도도 안 하는 다른 교인들을 보면 나일론신자이기 때문이라고 깎아내립니다. 자기희생이 자기성취와 자기 의로 전이된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자기부정이 상실된 것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한국교회의 특징은 자기희생입니다. 어느 나라 교회보다도 예배를 자주 많이 합니다. 선교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성경공부도 많이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교인들의 자기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시간에 거대한 양적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은 자기희생은 있으나 자기부정이 없는 것입니다. 더 엄밀히 말해 자기희생의 프레임에 빠져서 자기부정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세상 어느 나라 교회보다도 많이 교회 와서 예배를 하면서도 교회를 나서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새벽기도를 하는 유일한 민족이면서도 기도의 열매가 너무나 빈약한 현실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교회건물을 확장하는 것에는 적극적인데 반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는 소극적입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만 우리 동네에서 최고이고 열심과 희생을 다 하면서 옆에 교회는 비난과 경쟁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누구보다도 철저히 십일조를 하고 헌금을 하는데 교회 안에서조차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며 뭐니뭐니해도 돈이 최고라는 집착과 욕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희생과 자기 의가 결합하여 정작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인 자기부정과는 멀어진 우리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때 계명을 잘 지켰는지를 물어보신 예수님께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당당하게 모든 계명을 다 잘 지켰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자기 노력과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돌직구를 날리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태복음19:21)

실제로 재산을 다 팔고 오라는 자기희생을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아무리 그가 노력한들 끝내 할수 없었던 한가지가 있음을 끄집어 내신것입니다. 자기희생으로 율법은 지킬 수 있었으나 정작 재물에 대한 욕심은 버릴 수 없는 존재적인 한계입니다. 즉 인간이란 존재가 자기희생 차원에서 결코 이룰 수 없는 마지막 1%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원은 자기희생과 노력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로서는 무슨 수를 써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기부정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없이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낙타가 아무리 혼자 열심히 자기를 희생한들 바늘귀를 통과할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결론이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With man this is impossible, bu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마19:26) 어떤 종교적인 자기 희생이 아니라 자기 부정이라는 것이지요. 오직 하나님을 인정할 때 하나님이 가능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께서 생전에 인터뷰에서 이렇게 후회한 적이 있습니다. “”은퇴 후 저는 제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합니다. 왜냐면 교회를 너무 키워 버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교회론대로 목회했다면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즉 사랑의교회라는 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성장하도록 좀 더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목회를 해야 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못한 것 같아 하나님 앞에 죄송합니다.”

정말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를 부정하고 예수님을 인정함인데 우리의 초점이 제자 훈련을 해낸 나의 희생에 멈춰서 결국 또 다른 자기성취의 재료됨에 대한 반성입니다. 마치 자식을 위해 희생했으니 이제 자식인생이 내 꿈을 성취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부모와 같습니다.

열심히 희생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기부정입니다. 열심히 희생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나를 희생한다고 하지 마세요. 대신에 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생 말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기희생에 고착된 믿음은 결코 자기부정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자기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정하는 믿음은 필연적으로 자기희생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이 말하는 자기부정의 고귀함이고 능력이며 자유함입니다.  <1033 / 0803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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