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 디어 마이 프렌즈

<김호진목사 / 올랜도 연합감리교회 담임>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아직 끝까지 살아보지 않았으니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을 오래 살아보신 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합니다. 얼마 전 ‘디어 마이 프렌즈’라는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분명 늙음이란 것이 엄연한 인생의 현실인데 우리 주변에 노인들의 이야기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렇게 많은 드라마가 있어도 모두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거나 말도 안 되는 막장 이야기들 뿐입니다. 그나마 여기에 나오는 노인들은 존재감도 없을뿐더러 보이는 모습은 항상 희생하고 참고 병풍 같은 역할들을 합니다. 그런데 ‘디어 마이 프렌즈’라는 드라마는 노인이 주인공입니다. 결코, 미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 이 시대 노인들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보는 내내 마음이 울컥울컥해서 혼났습니다. 매운 음식 맵다면서 호호 불고 울며 먹듯이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울컥한 마음 꾹꾹 달래가며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얻은 결론은 노인의 삶에도 인생은 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젊을 땐 젊어 보지 않아서 인생에 서툴렀는데 늙어도 역시 늙어본 적이 없기에 인생이란 놈은 끝날 때까지 만만치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나는 원래가 청춘이고 노인은 원래가 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나 보니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미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분들은 원래가 노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할머니 댁 오래된 사진 앨범 속에 그분들의 젊은 시절 사진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요. “어 우리 할아버지도 젊었었네?” “우리 할머니도 앳된 처녀였어?” 노인들도 청춘이 있었어요. 반대로 우리 또한 이전에 더 젊었을 때 사진을 보고서 아이고 나도 늙었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 다 노인이 될 것입니다.

노년의 특징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흐르는 세월 앞에 몸은 늙는데 인생의 추억들은 늙지 않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몸은 나이가 점점 드는데 가슴 속 나이는 점점 젊어집니다. 기억력은 흐려지는데 추억은 더 또렷해지는 게 마치 엊그제 일 같습니다. 드라마 속에서 김혜자 씨에게 친구가 묻습니다. “이제껏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뭐였어?” “응, 첫아이 나은 기억” “그럼 가장 슬펐던 기억은?” “첫 아이 죽은 기억.” 노인이 되고 치매까지 있는데 50여 년 전 첫아이 낳은 그 행복한 기억은 전혀 늙지도 않고 사라질 기미도 없습니다. 첫 아이가 죽은 아픈 기억은 이제 기억의 너머로 사라져도 좋으련만 여전히 흐르는 세월 거슬러 옵니다.

흔히 노인분들이 말씀합니다. “아이고 더 살면 뭐해요.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이… 그저 오늘 밤이라도 자다가 조용히 가면 그게 복이에요.” 이 말씀만 들으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이렇게 하시면서 몸에 좋다는 약은 꼬박꼬박 챙겨 드십니다. 행여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 있다 싶으면 득달같이 병원으로 갑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음과 가까워진 인생이 죽음을 향해 가지는 담담함입니다. 동시에 생명과 삶에 대한 여전한 희망입니다. 그러니 시집 안 간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것하고,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 하고, 노인들이 이제 죽어야지 하는 말이 삼대 거짓말이란 말이 맞습니다.

젊을 땐 죽음이 저만치 있는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되면 죽음이 나랑 딱 반걸음 떨어져서 동행합니다. 그런데 생명은 참 아이러니하지요. 죽음과 내가 반걸음 떨어져 동행하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아름다움이 더 커진답니다. 이전에 몰랐던 삶의 소중함, 작은 일상의 아름다움, 정말 인생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보게 되는 눈이 열리는 축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들 키울 때 몰랐던 기쁨과 소중함이 손자를 볼 때는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가르쳐 ‘고해(苦海)’ 라고 합니다. 고통이 얼마나 큰지 바다입니다. 쓰디쓴 바다. 이 고통의 바다를 지나는 모든 인생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확정된 길을 갑니다. 태어남도 고통이요 늙음도 고통이고 병들어 고생하다 죽음의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참으로 인생 별거 없고 살아볼 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인생의 고해를 건너는 생로병사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고해의 바다, 쓴 바다, 고생 바다를 지나며 생로병사의 굴레 속에 있던 인생에 새로운 길이 되셨습니다. 곧 생명과 영생의 부활입니다. 고해의 바다 끝에서 침몰해 버리는 인생이 아니라 고해의 바다 끝에서 힘차게 비상하는 부활생명의 축복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생로병사(생). 죽음 뒤에 또 다른 ‘생’ 진짜 생명(영생)이 붙습니다. 이러니 인생이 살아볼 만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생은 하나님 없이 살다 죽는 인생입니다. 살아보려고 고생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인생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살 때에 하나님 알고 사는 인생은 복 받은 삶입니다. 고생해도 병에 걸려도 가난하게 살다가 늙어서 이제 죽음과 한걸음 떨어져 오늘을 산다 해도 여전히 인생 살아 볼 만합니다.

디어 마이 프렌즈 여러분!
인생 살아볼 만 하신가요? 감사하게도 예수가 있어 인생 살아볼 만합니다.
정말이지 땡큐입니다.
김호진 목사(www.MyHope.org) <1031 / 072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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