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가을의 꽃, 코스모스를 보며 ‘사색에 잠겨본다’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코스모스 꽃이 피는 계절, 가을이 되었다. 코스모스는 국화와 함께 가을을 연상케 하는 꽃의 대명사다. 그런데 요즘은 어찌된 영문인지 이른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계속 꽃이 피어난다. 이렇게 되다보니 코스모스가 가을꽃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제는 계절에 관계없이 피는 것 같다. 이처럼 철없이 코스모스가 피어나는 이유는 아마도 품종개량이나 기후 변화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식물도감을 보면 코스모스는 원래 6~10월 사이에 꽃이 핀다고 나와 있다. 자연 상태 그대로 있을 때 이야기다. 하지만 사람이 일부러 심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옛날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6월 달쯤 어느 날 날짜를 잡아 전교생들이 나와서 신작로에 담당구역을 정해 도로 양쪽길가에 코스모스를 심기도 했다. 코스모스는 심은 지 3개월이 지나면 꽃이 핀다. 6월 달에 심으면 가을이 시작되는 9월 중순이 되면 어김없이 꽃이 피고 그 꽃은 10월 중순경까지 한달 넘게 장관을 이룬다. 꽃이 9~10월 달에 피어나기에 코스모스가 가을의 전령사가 된 이유다. 코스모스는 한해살이풀이라 역시 가을에 피는 꽃이 제 맛이다. 그러던 것이 요즘에는 아무 때나 피어난다.
여름 들꽃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비울 무렵, 모든 채비를 마치고 가을을 맞은 코스모스는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우리가 코스모스로 가을을 인식하는 이유는, 가을의 시작이 코스모스전성기와 겹치기 때문일 것이다. 8월의 여름은 가을을 닮았고 9월의 가을은 여름을 닮았다. 계절이 오가는 길목에는 차단과 단절이 없다. 코스모스는 이 길목을 자유롭게 교통하며 가을의 계절감을 더하고 여름을 전송한다.
코스모스의 사전적인의미는 우주(Cosmos)이다. 왜 이 가을 들꽃이 우주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코스모스의 꽃을 자세히 드려다 보면 우리가 흔히 코스모스의 꽃잎으로 아는 8개의 꽃잎은 꽃부리(화관)의 일부가 변형돼 만들어진 설상화(舌狀花)이다.
즉 설상화는 생식능력이 없는 가짜 꽃이다. 코스모스에서 실제로 생식능력을 가진 부분은 꽃의 중심부에서 황색으로 빽빽하게 피어나는 작은 관상화(管狀花)이다. 이 관상화가 진짜 꽃이다. 관상화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기하게도 그것은 별모양의 형태를 띄고 있다. 즉 코스모스는 저마다 꽃송이 속에 수많은 별들을 품고 있는 하나의 우주인 셈이다.
그래서 우주이름을 따서 Cosmos인가보다. 코스모스의 꽃말은 순정이다. 가냘픈 몸으로 바람 따라 흔들리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길가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코스모스에게 참 잘 어울리는 꽃말이다. 이 가을에 사랑하는 연인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코스모스를 한다발 꺾어서 선물한다면 상대방의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순정에 반해 코스모스 꽃향기 같은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를 당신에게 보낼 것이며 정답게 당신의 입술위에 그 사람의 입술이 살프시 마주칠 것이다.
이제는 9월이 됐고, 그래서 가을이 찾아왔다. 젊은 시절 내가 맞는 가을은, 가을날의 차가운 가슴이 엄습을 하면 알 수 없는 서글픔과 쓸쓸함이 밀려들곤 했다. 가을의 애수가 무엇으로부터 연유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차가워진 몸은 따스한 열정과 낭만 감을 빼앗아가는 아픔을 느끼곤 했었나보다. 젊은 날엔 가을에 방황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방황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내 세월은 체념을 가르쳐주고 포기가 가슴속에 자리를 잡는다. 방황은 그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지막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청춘의 저항 같은…………. 그래서일까, 젊음을 까마득히 멀리 떠나보낸 지금에 와서는 가끔씩 그러한 방황까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세월이가면 또 얼마나 많은 날들을 후회하고 오열을 할까…….인간은 현재를 살수밖에 없고 현실은 늘 초라하거나 불완전하기에 인간은 늘 많은 후회와 미련을 담으며 세월이란 열차를 타고 지나가겠지……..인간은 진정 어떤 존재인지 알길이 없다. 알면 알수록 끝없는 절망과 염원의 존재 같은데, 그 미망의 꿈들은 어떻게 안식을 시켜야할지 알 길이 없다. 인간은 죽으면 무덤에 묻히는데, 사랑의 죽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린 추억 속에 담는다. 또는 묻는다라고 한다. 추억의 무덤은 또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이젠 만날 순 없지만, 그럼에도 진한 그리움을 동반하는 옛날의 얼굴들이 가슴속에 흐르곤 한다. 그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죽은 것일까? 아니면 내 추억의 앨범에 담긴 것일까? 그도 아니면 아직도 살아서 내 마음과 가슴속에 살고 있는 걸까. 인간은 죽어 무덤 속에 갇혀도 그 존재의 의미는 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들의 가슴에 담겨 남아 있나보다.
인간은 모두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각기 다르다. 그 다름은 신체나 정신에도 있겠지만, 마음 두기나 의미를 두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다. 무엇을 우리가 소중히 하고 아끼느냐에 따라 다른 인생과 가치관이 달라지듯이…… 우리들 인생은 철학하기와 실천이 있을 뿐이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거창한성공도 자기의 철학이 담기지 않았다면 허수아비와 같다. 남들이 모두 비웃는 인생도 자기만의 철학이 잘 담겨있다면 보석 같은 인생일 수도 있다.
인생의 쓸쓸함과 외로움은 운명적이다. 저 들꽃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보고도 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자격상실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꿈과 이상이 있어 외롭고 슬픈 족속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욕심을 줄이고 부족한 현실에 만족하기를 꿈꾸는 종교적 위로 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우물 안처럼 답답한 현실을 천국처럼 느끼며 사는 것이 현실적인 행복 법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름답고 파란 가을하늘 같은 꿈과 이상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 하늘이 내 것이 아니라도 그 상상의 비행만으로 행복하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의 위로법이니까………
myongyul@gmail.com <992/0916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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