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기독교 부적 – 정말 믿는 자에겐 불가능이 없는가?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 23)우리는 이 한 문장에 너무 오랫동안 속아왔습니다. 소위 이 말씀을 복권처럼, 부적처럼 몸 어딘가, 마음 속 어딘가, 집 어딘가에 꼭 넣어두고 살아왔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너희가 몸 어딘가에, 집 거실에 걸어두고 부적같이 믿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세상 지탱해줄 어떤 괴력을 지닌 무엇 인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어떤 특효가 있는 말씀들을 그 괴력을 지닌 말씀으로 여기고 여기저기 걸어둡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믿는지도 모른 체 믿음에 과감한 배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라도 걸어 두면 믿는 사람인 것처럼 여겨주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이 한국 사람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샤머니즘의 정신을 교묘하게 이용한 상술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불가능) 없다”는 기독교 부적들이 액자에 걸려 벽에, 문에, 상점에, 식당에 걸어둡니다. 이 정도면 거의 부적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게 개업하면 의례히 이 부적을 보기 좋은 곳에 걸어둡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통방통한 부적같이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부분에서 강하게 힘을 주고, 더 세게 강조한다. 원하는 필요, 직면한 문제, 위기, 어려움을 이기게 해달라는 강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그 부적의 말씀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부적을 사용해 자신의 필요를 얻었는지 간증을 하면서 이 부적에 대한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비싸고 멋진 액자에 넣어 걸어놔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사람은 교회에서 그저 믿음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도 믿음 있는 사람이되서 원하는 것을 만껏 얻어내려고 불철주야 철야에 산기도에, 금식에, 40일기도회, 등의 수많은 모임을 전전긍긍하면서 괴력의 힘이 나에게도 임하도록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최대 대형교회 목사인 죠엘 오스틴 목사는 이 부적의 괴력을 가장 많이 맛본 장본인 입니다. 부적 + 긍정의 힘이라는 뒤섞인 부적으로 놀라운 성장과 명성과 소위 축복을 얻었습니다. 예수 없이도 긍정적 마인드, 긍정적 생각, 긍정적 사고를 가지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주술적인 설교에 전 세계가 열광을 하고, 그의 긍정의 힘이란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입니까? 그것이 예수 죽은 흔적을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하는 성도의 목숨 내건 신앙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까? 정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까? 저는 목사로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신념은 좀 좋아지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고, 역경을 이길 수 있는 마음가짐은 생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영역을 내 삶에 가져오는 어떤 괴력이 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만약 이 말씀을 이렇게 바꾸신다면 어떨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네가 날 믿는 다면 너는 어떤 핍박과 죽음이 너에게 몰려와도 너는 그것을 능히 견딜 수 있어야 한단다.” 이런 말씀이어도 이 부적을 집에 걸어 둘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내가 원하는 모든 성공과 부를 얻어낼 수 있는 만능 자판기가 아닙니다. 내가 믿는 믿음으로 인해 죽음의 위협과 핍박과 순교를 당하게 된다 해도 결코 미동도하지 않는 능력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것이 어디 긍정의 힘에서 나오겠습니까? 현실적 인 복에 안주하는 신앙에서 나오겠습니까? 두 주먹 불끈 쥐고 “믿습니다” 한다고 나오겠습니까?

그 능력은 오늘 죽어야 하는 순간이 와도 죽음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시련, 역경, 고난, 핍박을 통해 더 강하게 되고, 더 단단하게 단련됩니다. 시련과 고난과 어려움을 피해보고, 재앙을 막아보려는 액땜신앙이 곧 부적신앙인 것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사드락, 매삭, 아벳느고가 그들의 신앙을 절개를 지켜 우상에게 절하지 않음으로 그들이 승승장구하지 않고, 풀무 불 속으로 쳐 넣어 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이 풀무 불 속에 들어간 후 그들의 흔적은 더 이상 다니엘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이 그들의 역할입니다. 그들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 신앙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진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위기에 순간에 하나님의 보호와 지켜주심으로 위기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 속으로 하나님을 믿기에 뛰어 들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것이 끝판 신앙입니다. 이것은 결코 긍정의 힘이나, “능치 못할 것이 없음을 믿습니다.” 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말 죽기 위해 불로 들어갔습니다. 불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살려주지 않습니다. 걸어가는 길에 구원해 주지 않습니다. 그 불 속에 구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불 속으로 들어가게 만듭니다.

정말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 부적을 띠고 불안으로 뛰어 들어갈 준비를 하십시오. 살리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그거, 정말 그것을 신뢰 할 수 있습니까? 대단하게 믿었다가 수틀리면 그 믿음 어디로 온데간데없이 내 팽개쳐 버리는 것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본질 아닙니까?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그 믿음을 절대로 신뢰하지 마십시오. 혹 여러분이 여러분의 믿음을 믿으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어쩌면 마가복음에 나오는 귀신들려 고통 하는 아버지의 고백이 우리의 마음에 더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 우리를 불쌍히 여기서 도와주소서, 예수여!”부적은 우리의 참 신앙을 도적질 해 갑니다. 잘못된 믿음의 길로 가게 합니다. 실제로 부적이 힘이 있는 것인 아니라 그 부적에게 힘을 실어주기 때문에 부적도 일정한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그 상황을 견딜 수 있게 해주고, 자족하기를 배울 수 있게 해주며, 가난할 때는 가난 해질 수 있고, 부할 때는 부해질 수 있으되 그 기준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리스도 한분 외에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바로 그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요동함 없이 복음을 위해 죽어야 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인 것 이다. <981 / 06242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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