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꾸러기의 짧은 글 긴 생각> 이름값 하십니까?

이경규목사 / 서울 새로운 성결교회 담임
이경규 목사의 이름값은 얼마나 될까?
엉뚱한 이야기 같지만 한번쯤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래전 탤런트 ‘하리수’씨와 그의 전 소속사인 TTM 간의 ‘하리수’라는 예명을 두고 법정 분쟁까지 갔는데 전 소속사인 TTM이 하리수 이름을 사용하는 조건으로 30억원을 제시하자 하리수 씨는 합의도출에 노력은 하겠지만 자신의 예명을 고수 하겠다는 입장으로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이름값이 30억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에 ‘목사’라는 이름값은 얼마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적이지만 ‘목사’라는 이름은 값이 없는 것임을 생각하면서도 나는 과연 목사라는 이름값을 하는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가 군법회의에 회부된 병사를 최종 심문하게 되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알렉산더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다시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알렉산더입니다”
화가 난 알렉산더 대왕이 소리쳤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네 이름을 대라”
병사는 세 번째도 똑같은 말로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대왕은 “너는 네가 지은 죄만큼 벌을 받도록 하라. 그리고 이름을 바꾸든지 행실을 고치든지 선택하도록 하라. 그리고 앞으로는 아무도 내 이름 알렉산더를 자기 이름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링컨은 “사람은 40이 지나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얼굴값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뜻으로 해석하면 이름값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름이란 안디옥에서 처음 불려졌습니다.
사도행전 11:26절을 보면 “제자들이 비로소 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리스차노스’ 혹 ‘크리스차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이는 ‘누구누구 집의 노예들’이라 는 뜻입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이 조소하면서 불렀던 그 이름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 이름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 이름은 영광스러운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들어서 부쩍 그리스도인들이 이름값을 못한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전국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 가운데 3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통계 가 나왔습니다.
즉 이름값을 못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입니다.
목사면 목사다워야 하고 장로면 장로다워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목사도 장로도 이름값을 못하면서 이름 내기를 좋아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원래 이름을 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심인데 인간은 인간 스스로 이름을 내자고 하면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반하는 죄악입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삶의 방식입니다.

1912년,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사건은 역사의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자존심이라 상징되었던 타이타닉호가 출항할 때 언론은 “절대로 침몰될 수 없는 배”라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는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고 방정을 떨었지만 항해 몇 시간 만에 북극에서 떠내려 오는 빙산에 타이타닉 호는 두 동강이 나면서 1513명이 수장되었습니다.
인간의 교만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초라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역사적 교훈 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계 신문을 보면 기관 단체가 소개될 때 대표회장, 상임회장, 실무회장, 직전회장, 증경회장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이름들이 거명됩니다.
그 뿐 아니라 교회 이름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늦게 설립되어도 제일교회, 변두리에 세우고도 중앙교회, 날마다 불협화음으로 조용할 날 없는데도 화평교회, 지역사회에 지탄받으면서 사랑의 교회, 주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면서 주님의 교회 등등 교회 이름만 살펴보아도 이름값을 하는 교회가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 봅니다.

나는 이름값 하고 사는가??
<967/0311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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