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꾸러기의 짧은 글 긴 생각> 복음의 출발점

이경규목사 / 서울 새로운 성결교회 담임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과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복음의 내용에 대한 설명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자.
로마서 1:16을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설명할 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은 바울 사도가 자신이 말하는 내용, 즉 복음이 ‘자랑스럽다’는 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 부정적인 표현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에는 복음의 출발점에 대한 우리의 ‘사고의 순서’와는 상당히 다른 방식의 전개가 있습니다.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놓고는 이 말씀을 듣는 이에게 이 말씀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고 했을 때 상대방이 ‘도대체 내가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되물어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라는 답변을 주로 하는가? 아니면 ‘믿으면 축복을 받는다’라는 답변을 주로 하는가?

사도 바울은 복음을 얘기할 때, 언제나 그 처음을 ‘자랑스럽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왜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지 18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나나니’라고 밝히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의와 자랑스러움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문제가 항상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는 어떤 것을 갖고 있어서 자랑스럽다’고 할 때, 그 자랑스러움의 이유는 다름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이야기 할 때도 사도바울 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과, 그 구원을 얻지 못한 자가 당할 문제들에 대한 확실한 제시’가 있기에 자랑스러운 것이다. 구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믿지 않으면 반드시 지옥에 가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의’를 제시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경각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복음이 복음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우리 사회의 지성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단순히 지옥에 갈까 무서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저는 상당히 놀랬습니다. 지옥 갈까 무서워 믿는 예수라니, 그렇게 믿어서야 되겠습니까?’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답변을 하겠습니까? 지옥 가는 것이 무서워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 말은 점수로 채점한다면 몇 점이나 주시겠습니까? 저는 적어도 70점 이상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지적하는 ‘우리가 저주 아래 있다. 우리는 죄인이다’라는 말은 무척 싫어한다. ‘죄, 지옥, 저주’를 말하지 말고, ‘천국, 영광, 책임, 사명, 수준’ 이런 말을 하자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옥 때문에 예수 믿지 말고, 사명과 영광을 위해 예수를 믿자는 가장 큰 이유는 자존심 때문입니다. 기껏 지옥이 무서워 믿는 정도밖에 안 되는 그런 기독교로 이야기하지 말고, 좀 더 괜찮게 적극적인 구실을 붙이자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런 태도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죄란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조차도 떳떳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는 자로 자신을 자꾸 높여 하나님 앞에서 일 대 일로 떳떳해진 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보란 듯이 ‘선물’을 들고 가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도, 신앙도 아니다. 오히려 죄다. 하나님 앞에서 ‘제가 지옥 갈 죄인인데 구해주십시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바라며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선물을 싸 가지고 들어가서 자랑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기 위한 태도에 불과하다. 이것만큼 죄의 ‘죄 된’ 모습을 가장 잘 감추고 있는 것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일 대 일로 떳떳하게 설 수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의 근본 배경은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많이 속고 있는 부분들이다.
죄란 근본적으로 도덕성이나 윤리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죄에도 여러 단계가 있어 나중에는 교묘하게 천사의 모습으로까지 나타난다.성경은 어느 구절에서나 죄에 대하여 더 이상 비참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설명이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서 그 처참한 꼴을 당하면서 죽으셔야 했던 것이다. 십자가에 대하여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하나님이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기로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눈이 멀어서 예수님을 그렇게 채찍질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대하여 너무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 자신이 그 ‘괄시’의 길을 요구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 그래야 했나? 이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당하신 채찍과 오해, 경멸과 비참한 상태와 실제적인 육체적 아픔, 영적인 고통의 부르짖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마27:42)’는 간악한 무리들의 말이 주는 엄청난 아픔에 대해, ‘예수님께서 그런 고통을 당하셨구나’하는 슬픔의 감정을 갖기보다는 ‘하나님이 죄에 대해 이만큼 철저하게 이를 갈고 계시는구나’라고 바꾸어 생각해야 한다.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에 ‘살려주십시오’라고 아우성 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처지를 인식하지 못하면 사도 바울이 전한 ‘나는 복음이 자랑스럽다’는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에는 이처럼 인간의 구원에 관한 결정적인 해결책이 있다. 이 해결책을 갖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복음이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해결책을 가진 자는 가진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지닌 축복을 확인하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상태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 이해를 얼마나 깊이 하느냐에 따라 예수를 믿게 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에서 감사하는 생활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를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사실 하나만 붙들고, 죽을 때까지 살라면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것을 안 주신다고 해도, 예를 들면 좋은 직장이 없어도, 멋있는 남자가 안 나타나도, 건강을 잃고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어떠하더라도 하나님 때문에 만족할 수 있는가?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닌 공통적인 문제는 구원을 얻는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도 진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축복은 이 세상이 우리를 할퀴는 것으로도 빼앗길 수 없고, 이 세상이 우리를 환난에 처하게 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우리는 늘 이 사실을 확인하고 명심해야 한다. <951/11112014>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