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칼럼> 죽은 윌리엄스의 사회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우리에게 즐거운 추억과 웃음을 선사해주었던 로빈 윌리엄스가 향년 62세의 젊은 나이로 자택에서 자살한 체로 발견됐다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지난 11일 NBC 등 외신들의 보도에 따르면 로빈 윌리엄스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티뷰론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마린 카운티 경찰국은 윌리엄스가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습니다.
1987년 ‘굿 모닝 베트남’을 통해 로빈 윌리엄스는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그 후’죽은 시인의 ”후크” 토이즈 ”알라딘” 미세스 다웃 파이어’ 등의 대표작이 연이어 개봉하며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에 이르는 동안 로빈 윌리엄스는 세계적인 스타로 각광받게 되고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의 이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늘 웃는 얼굴의 온화한 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인 모습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대중에게 늘 웃음을 주는 배우였지만 사실 개인 로빈 윌리엄스는 알코올과 마약 등에 중독돼 힘겨운 나날을 보냈지만 힘겹게 중독을 극복한 대표적인 연예인으로 분류되기도 했던 그가 결국 최근 들어 다시 알코올 중독으로 힘겨워 한다고 알려져 팬들을 안타깝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울증 까지 더해진 힘겨운 상황에서 그는 자살이라는 안타까운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사회는 이처럼 밖으로는 웃고 있지만 그 속은 아프고, 고통하고,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상실감의 사회, 공허감의 사회요, 절망적 인간 고립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내면의 절망감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는 술판을 벌여 놓았습니다. 알코올중독자들이 해가 거듭될수록 늘어가고 있고, 마약은 이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동네 의약품정도가 되었습니다.
한 죽은 희극배우의 삶은 비단 안타까움에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 숨겨진 고통의 삶을 살고 있는 이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이 사회는 갈수록 정신적 장애가 더 심각해지는 사회구조로 발전되어 가고 있고, 긴장감과 압박, 스트레스의 상승이 더 가파르게 그 수치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낮에는 제주 지검장으로, 밤에는 바바리 맨으로 변신한 사건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정신적 장애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일면의 사건이기도 한 예입니다.

사람들은 밖으로 드러난 자아와 숨겨진 자아가 있습니다. 끝임 없이 인정받고 싶어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자신의 존재감을 표출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하고, 체면 때문에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날까 봐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진짜 나의 본 모습은 밖으로 드러난 모습이 아닌 내면 속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모습입니다. 아무도 들어와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함부로 취급하지 못하도록, 심지어는 숨겨진 내면의 자아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극도의 과민상태와 방어적 태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실 웃고 있는 윌리엄스의 모습, 그 속에는 울고 있는 죽은 윌리엄스의 자화상이 숨어 있던 것입니다.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곁에 있던 아내조차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의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심각한지 자신의 내면 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를 살아간 한 희극배우의 울고 있는 자아이자, 죽어가는 자신의 내면의 또 다른 우울한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 슬픔의 사회이고, 어두운 사회이며, 깊은 내면의 고통과 슬픔을 꽁꽁 감싼 체 그 고통 속에서 점점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회는 점점 메말라가고, 사랑은 왜곡되고,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회가 돼가고 있는 것입니다. 쾌락이 진정한 행복을 빼앗고, 술과 마약과 도박이 가정의 행복을 말살시켜가고 있습니다.
한 희극배우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남깁니다. 그가 진정으로 살고자 했던 사회는 어떤 곳이었을까? 그가 살아왔던 사회는 과연 그의 웃음 너머의 숨겨진 그의 고통을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의 인기와 웃음을 팔아 허울좋은 사회의 명성과 돈의 노예로 살아가도록 철저히 그를 죽어가도록 방치해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의 순간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알츠하이머 초기 단계인 손 떨림, 기억력 상실이 현실화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더 의미 있는 삶을 향한 싸움을 선택하기 보다 지난 시간을 행복한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어쩌면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사회의 단면이다” 라고 외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행복은 눈에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웃고 있는 모습이 진짜 행복한 모습은 아닐 수 있습니다. 화려하고 포장된 멋진 빌딩 뒤에는 항상 어둡고 고통하고 힘겹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듯, 우리의 내면은 경제발전과 삶의 질이 더 좋아질 수록, 첨단과학이 발달할 수록 더 어둡고 고통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화려함의 뒷면인지 모릅니다.

죽은 윌리엄스의 사회,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회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세상이 추구하는 성공과 돈과 명예를 붙잡기 위해 윌리엄스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한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윌리엄스의 삶,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몬스터 사회의 희생제물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회엔 진정한 희망, 소망, 미래는 분명 단언하건대 없습니다. 그것들은 분명 신기루 일뿐입니다.
지금 죽은 윌리엄스의 사회를 살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 그 죽음의 사회를 치유하실 수 있고, 나만이 아는 내면의 아픔과 고통과 상처, 알코올중독과 마약, 도박 중독, 성 중독에서 나를 치유해주시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들었던 생명 없는 예수, 설교에만 등장하는 예수, 수많은 책들 속에 끼어 있는 예수가 아닌 여러분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분,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 정말 내 삶에 능력이 되셔서 내면의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주실 수 있으신 바로 그분을 이 사회가 만나야 합니다. 그분만이 죽은 윌리엄스의 사회를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941/0826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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