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칼럼> 우리가 제사장이라 구요!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칼럼을 쓰면서 보람 있는 일은 졸필을 읽고 전화해서 잘 읽었다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의 말을 들을 때입니다. 그래도 공감하시는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시다는 것이 힘이 되고 용기를 얻고 다시 글을 쓰게 됩니다.
왕 같은 제사장에 관한 글을 읽고 나름 고견을 피력해 주셔서 몇 번에 걸쳐 이 부분을 좀더 다루려고 합니다. 이 글은 특정인을 폄하하거나, 깎아 내리려는 의도에서 쓰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밝힙니다. 이것은 제가 가진 소신이자 원칙이기에 조금은 주관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제 나름의 소신이기에 지면을 통해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이민교회도 포함하여)는 목회자 관에 대해 은연중 이든, 그렇게 믿어 왔던 목회자를 마치 구약의 제사장 같이 여겨 왔습니다. 물론 영적 지도자를 존경의 대상으로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 발상은 매우 위험 천만합니다.
혹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이며, 성경을 상당히 위배하는 그릇된 형태의 목회관을 양산해 내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목사 제도는 성경에 언급된 사도나, 제사장이 아닙니다. 목사 제도가 기독교 공동체 안에 들어와 부동의 자리를 잡은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요즘 같이 교회의 타락이 급속하게 빨리 지고 있고, 인본주의와 교권주의가 더 기세를 부리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보면 분명 목사제도는 지극히 인본주의적 부산물이 아닌 가 생각이 됩니다.

성경은 목사대신 목자라고 부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자가 훨씬 덜 권위적이고, 성경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나는 선한 목자”라고 부르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럼 에도 목사들이 자신을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벌써 생명의 위기와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겼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미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 목사 자신을 제사장같이 여긴다면 정말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떨림과 몸서리치듯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과 자신의 전부를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데 밤낮이 없어야 하고, 그분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온전한 마음으로 가르치며,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직무는 무너지고 부서져도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함이 철저히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두려움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진정 지금 이 시대에 목회현장에 쏟아져 나오는 목사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거룩한 경외감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교회가 기업이 되고 자신이 교회의 일인독재 체제가 되고, 자신이 우상이 되게 만들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 안에 과연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 그분의 보좌가 준비되어 있기는 한 것입니까?. 정말 주님의 몸인 교회는 사람이 만든 제도나, 법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이끌어져 나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단 법이, 교회법이 우선시되고, 그 법을 어긴다고 하나님도 정죄치 않으시는 죄를 만들어 정죄하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현상들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버젓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우리 안에는 정말 그분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주님은 영원한 제사장으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십자가에 내주었습니다. 한마리 양을 위해 자신의 안정과 평안과 쉼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칭 그분의 제사장들이라고 칭하는 분들은 그분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강당은 자신을 반대하는 성도를 향해 말씀의 검(?)을 휘두르는 공식적으로 허용된 현장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내는 그 땀 냄새나고 잠 못 자고 번 돈을 손에 쥐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유용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혹 우리 교회는 목자가 아닌 기업의 CEO를 모시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개인 회사로 전락되고, 성도들은 예수님이 아닌 회사 총수를 위해 자원하여 뼈 빠지게 일하지 않습니까?.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어야 할 교회는 상처 주는 권위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오늘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경건의 모양이 경건의 능력을 대신해 버린 교회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교회를 사유화시키고 성도들을 자신의 전유물 정도로 여기는 삯꾼을 어찌 감히 제사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업신여겨도 유분수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취급하니 어찌 그것을 주님의 교회라 할 수 있습니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들의 발을 씻기라고 주님이 잡히시던 날 저녁에 말씀 하셨음에도 그것을 남의 얘기로 흘려 들으니 어찌 강당이 썩어 구역질이 나지 않겠습니까?. 행사하고 싶은 권위와 요구는 많아지는데 영혼들에게 줄 수 있는 자원은 점점 더 고갈 돼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대표하는 전부라면 차라리 목사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목회를 그만두는 것이 더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에 대해서는 왕의 권위를 갖고 행동하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해서는 하염없는 연민의 마음을 품고, 종의 마음과 행실로 섬기며, 세상과 하나님의, 죄인과 예수님의 중매자가 되어주는 바로 그런 사람이 바로 왕이요 제사장의 삶을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교인이 아니라 제자일 것입니다.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내가 곧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자신의 삶을 세상에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제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나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며 사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처받은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잃어버린 영혼들은 전전긍긍하고 이단에 빼앗겨도, 심지어는 죄의 자식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속수무책일 뿐입니다. 그렇게 만든 목사들(저를 포함해)이 먼저 지옥에 들어가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분의 자녀들을 저렇게 처참하고 황폐하게 만든 죄 때문에 말입니다.

연세 지극히 드신 한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젊을 때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열심히 사역했지만 세계는 변하지 않았네, 그래서 나라를 변화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네 그런데 나라도 변하지 않더군, 그래서 도시를 변화시키려고 온 힘을 쏟았다네! 그런데 여전히 도시는 끄덕도 안 하더군! 할 수 없이 남은 삶을 교회를 변화시켜 보려고 목숨 걸고 섬겼지만 역시 교회도 변하지 않더군 그래! 그래서 이제 나이 들어 깨닫게 되었다네 나를 먼저 변화시킬걸, 그것을 가장 먼저 했더라면 다른 모든 것도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그렇습니다. 가장 먼저 나를 변화시켰다면 교인도, 교회도, 지역사회도, 불신자들도, 조금씩 변화되어 갔을텐데요! 교인들의 고집을 꺾기 전에 나의 완고함을 먼저 변화시켰다면, 교회에 제도를 바꾸기 전에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에 먼저 칼을 댔다면, 목사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기 전에 그 영혼을 가슴에 품고 울 수 있는 심장을 먼저 가졌더라면 이렇게 가슴 아프진 않았을 텐데요?.
하나님께서는 화목제사를 드린 제물 중 제사장의 몫으로 가슴살과 오른쪽 뒷다리를 분 깃으로 주셨습니다. 그것은 지도자들이 영혼들을 가슴으로 품고 부지런히 영혼들을 찾아다니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입었던 제사장의 겉옷을 벗어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진짜 종의 모습으로 행하면 사람들은 나를 우습게 볼지 몰라도 그분께서는 나를 진실로 대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면 족한 것입니다. <929/05282014>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