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세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창(窓)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두가지의 마음이 존재하며 항상 대립상태를 이루고 있다. 긍정적 마음과 부정적 마음이 그것인데, 긍정적 마음이란 가능성이 내포된 밝고 자신감을 갖게 하며 무엇이던지 할 수 있고 하면 된다는 진취적인 마음이고, 부정적인 마음은 위의 긍정적 마음의 반대다. 여기에는 가능성보다는 안 되는 불가능성이 지배를 이루는 마음이다. 절망이나 좌절이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는 것이 부정적인 마음이다. 때문에 행복은 긍정의 마음에서 생겨나고 불행은 부정적인 마음에서 발로된다.
종교적 측면에서 본다면 긍정은 신앙의 소산이고 부정은 불신앙의 소산이며 긍정은 희망을 낳고 부정은 절망을 낳는다. 심리학에서 영어의 프레임(Frame)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모양, 액자, 또는 틀이라는 뜻이 담겨있는데 이것의 말뜻을 심리학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窓)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행복하기도하고 불행하기도 한다. 가령 컵 속에 물의 양을 보고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면에서 “아직도 반이 남았네’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겨우 반밖에 안 남았네”하고 부정적으로 판단을 내린다. 이 말의 뜻은 세상을 긍정적인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알려준다. 이와 같이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은 올바른 프레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가령 아래의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올바른 프레임의 마음적 자세를 살펴보자.
부모님의 가사 일을 도와주는 일을 예로 들어보면 ‘가족간의사랑, 부모님의 노고를 이해하는 소중한 시간’으로 긍정적인 마음으로 매사의 일을 기쁘게 받아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귀찮고 하기 싫은 심부름, 먼지속의 청소, 친구들과의 약속지연 등등 구체적인 상황들을 떠올리면서 안 좋고 하기 싫은 일로 모든 것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일상을 긍정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늘 의미중심의 상위수준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살을 빼는 다이어트, 금주, 금연, 공부계획 등의 장기적인 계획들이 작심삼일로 끝나는 것도 처음에는 의미중심의 사위수준의 프레임으로 생각하다가 막상 실천을 하게 되면 구체적인 상황을 들먹여 하위수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가까운 미래나 현재의 일들도 언제나 상위수준의 프레임으로 보고 실천을 해야 한다.
세상은 내가 보는 대로 보인다. 우리는 내 마음의 창을 통하여 세상을 받아들이고 해석을 한다. 어느 사람은 선하고 올바른 마음의 창으로 세상을 볼 것이고 또 어느 사람은 그릇되고 악한 마음의창으로 세상을 본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마음의 창을 갖고 있기에 이 창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의창을 열어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겨날 때가 많다. 그러나 설사 이 창처럼 다른이의 마음의창을 열어볼 수 있다 치더라도 그것은 시간도 많이 걸릴 뿐 아니라 내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의창을 열어 옳고 그름에 부딪쳐야 하는 곤고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내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 마음의창을 보려고 하다니 그것은 모순이다. 우선은 내 마음의 창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정상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창의 눈이 나에게 행복을 부를 수도 있고 고통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하겠다. 밝고 맑고 고운 우리의 마음이 더욱 아름다움을 낳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밝고 맑고 고운 마음으로 안으니 이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의 눈은 마음의 창이다. 우리의 눈이 어디를 향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마음도 달라진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나의 마음이 머물기 때문이다. 마음의 창이 닫혀있으면 내면의 빛도 생겨나지 않는다. 내 마음의 창을 어떻게 열고 닫느냐에 따라 마음도 달라진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면 내 마음의 자리가 좁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깨끗한 시야를 가꾸어서 이웃과 가족, 친구 등 모두를 사랑하는 창이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사람의 눈은 현재의 그를 말하고 입은 그의 미래를 말하여준다는 말이 있듯이 눈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살아왔나를 말해준다는 얘기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눈으로 많은 것을 본다. 그런데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도 있고 추악한 것도 있으며 겉으로 나타난 것도 있지만 숨겨진 것도 많은데 우리는 무엇을 보느냐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성경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눈동자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세상을 그분의 마음을 가지고 보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들은 보아야할 것은 외면하고 보지 않아도 되는 것에만 시선을 두고 살아간다. 탈무드에 ‘우리의 눈동자가 검은 것은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을 보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우리들의 삶이 종종 어둡고 힘들어도 결코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잠시 비뚤어지고 올바르지 않은 수렁 속에서 헤맸어도 다시 벗어나오면 그 어두움을 통해서 밝은 미래를 바라본 우리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을 하실 텐데 말이다.
어느 책에서 본 기억나는 말이 있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고 빠름은 부지런함이 아니다. 느림은 여유이며 안식이고 자기를 되돌아보는 성찰이며 평화이다. 그리고 빠름은 불안이자 위기이며 오만이고 이기이며 무한 경쟁이다. 땅속에 있는 금을 꺼내어 닦지 않으면 금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 마음속에 있는 정서의 창을 열고 닦지 않으면 창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 낫다고 하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내 생각이 가장 합리적이고 내 표현이 가장 적합하고 나의 행동방식이 가장 올바르다는 자만심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타인의 의견에 쉽게 반대하고 무시하면서 타인의 행동을 비판하려든다. 실제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도 자기 스스로 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자신을 과대포장하며 흡사 빈 수레처럼 요란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제 잘난 멋에 사는 게 인생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자신이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임을 알게 됐을 때 그는 지혜로워졌다고 한다. 바꿔 말한다면 자신이 지혜로워지면 스스로 자신이 참으로 하찮음을 알게 된다. 흔히들 말하는 지혜의 정의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나는 잘 모르겠다’라고 인정하는 게 지혜라는 말이다. 즉 지혜롭다는 것은 한없이 겸손하다는 의미이다. 사람과 사람들과의 다툼의 근본적인 이유는 교만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교만은 겸손과 반대되는 뜻이다. 자신의 교만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는 다툼과 시기와 미움이 상존한다고 한다.
교만하기 때문에 적을 만들고, 마음의 상처를 만들고, 힘든 삶을 만들어 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변하는 첫걸음이 바로 자신이 바로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남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하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주제넘은 일이기도 하다. 별것도 아닌 내가 누구에게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지적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X묻은 개가 X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 된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것들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주장하기 전에 내 자신의 마음의창부터 점검해보자.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면서 남의 눈에 티끌만 본다”라는 속담이 있다. 내 마음의 창은 무엇을 비적하고 비판할 만큼 충분히 넓고 자격을 갖추었는지 아주 냉정할 정도로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함을 챙겨봐야겠다. 그런 자세야말로 삶의 지혜이고 자기만의 창을 깨끗이 유지하고 사는 삶의 비결인 것이다. <myongyul@gmail.com> 926/0506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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