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고난이란 이름으로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새봄은 고난을 견딘 결과로 옵니다. 예쁘고, 화려한 나비는 고통을 통과해 만들어진 창조물의 결정체입니다. 파릇한 나무 잎을 보면 고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그 잎새 자체가 겨울 인고의 과정을 견딘 훈장입니다.
고난은 어느듯 평범한 일상이 되 우리 곁에 와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며,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이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배웠음에도 여전히 고난은 우리에게 고통과 아픔입니다.
우리는 고난이란 이름으로 만나는 수많은 인생의 사건들을 책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 페이지를 만나면 그냥 지나고 싶고, 안보고, 안 읽고 싶은 페이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페이지가 쓰여지지 않으면 그 다음에 오게될 희망도 쓸 수 없게 됩니다. 그 다음의 페이지를 써 내려가야 할 미래도 단지 흰색 종이로만 남게될 뿐입니다.
우리가 고난이란 이름으로 경험하고 맞이하는 수많은 사건들, 일들, 경험들, 과정들은 어둡고, 회색과 검정색 톤으로 범벅이 되있고, 칙칙하게 보이고, 구질구질하게 나의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그 페이지가 없이는 결코 그 다음 페이지에다가는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의 역경이 없이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혹 인생의 역경이 없이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성공이 아닐 겁니다. 때론 우리는 행운을 위해 행복을 무참히 짖밟습니다. 행운을 잡기 위해 가장 가까이에 있는 행복을 무시하고, 관심조차 두지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가장 큰 고통은 행운을 쫒는 사람들이 무참하게 짖밟은 행복이 아닐까요? 결국 그 행운 때문에 여러분의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고난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당당하게 맞닥트리고 맞이하십시오. 고난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살아있는 생명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살려고 하는 사람의 의지마저 꺾어 버릴 수 없습니다. 결국 고난이 우리 발앞에 무릎꿇게 될 때. 그 고난을 이기고 고난 뒤에 감춰진 환희와 영광을 얻게 되는 날 그 고난은 나에게 유익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 정말 멋진 삶인 것입니다.
장석주씨의 [인생의 한 수를 두다]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실패를 진저리치게 겪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해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중퇴했습니다. 작은 도시에서 상점을 냈는데 곧 빚만 안고 파산했습니다. 워낙 가진게 없어 그 빚을 갚는데 15년이나 걸렸습니다. 결혼을 하지만 불행한 결혼이었습니다. 그 뒤 하원에 입후보뒤에 신문에서는 매일 비판을 받고, 국민의 반은 그를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역사에 위대한 정치가로 제 이름을 남겼습니다. 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노동자 출신의 이 사람은 끝없는 실패 와 시련을 헤쳐 나왔습니다. 이 사람은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에브라함 링컨입니다”
우리는 고난이란 이름의 침입자들로 인해 자신의 모든 삶을 송두리체 빼앗겨버린 한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 때문에 좌절할 수 있고, 낙심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 고난안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그것은 고난에 승복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 입니다. 그 결과 고난을 승리로 승화시켜버렸습니다. 사람들의 배척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승화시켜버렸습니다. 고난이 그분에게는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었지만 그 고난을 통해 용서와 사랑과 희생이란 값진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성공을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행복한 삶을 설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행복한 길보단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자신의 평안한 방법을 찾기보단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든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 뜻을 행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안정감과 평안함을 뒤로 했던 분입니다. 급기야는 자신의 원하는 것을 한번만 들어 달라고 애원을 하며 기도하면서도 결국 아버지의 뜻 앞에서 자신의 원하는 바를 꺾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그 고난의 수순까지 가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의 고난을 배울 수 없습니다.
고난은 말로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길을 걸으며 고난의 방법을 선택함으로 배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고난을 선택하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항상 고난의 길입니다. 그 고난으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누리고, 그 고난으로 우리가 더 나은 성공을 얻고, 더 나은 명성과 부를 얻고 있다면 우리는 그 고난의 가치를 잘못 알고있는 것입니다. 그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되고, 그 고난 때문에 유명의 자리에서 벗어나 무명한자의 자리로 나가게 되고, 세상 성공의 길이 아닌 그 반대길을 향하게 할지라도, 비록 지금은 가난에 처해 있을지라도 지금 아버지의 뜻 가운데 있음에 감사하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진짜 고난의 주를 아는 삶이 아닐까요?
이번 사순절기간, 그분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될 때 비로써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순간이고, 예수님과 그분의 삶을 내 것으로 영접하는 그분과의 일체되는 작은 예수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923/0408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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