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왕같은 제사장이 되라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한국에는 3가지 모를 일이 있다고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 안철수의원의 새정치, 김정은의 속마음” 이랍니다. 의미전달방식에 익숙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일단 저질러 놓고 보자는 식의 발상이 엿보입니다. 큰 화두 하나를 꺼내놓고 분위기 봐가면서 하나씩 양파를 벗기는 식으로 그 의미를 만들어 가는 수사학적 발상이랄까?.
정답을 먼저 만들어 놓고 그 정답 을 위한 수많은 공식들을 나열하는 지적본능의 수사학적 우월주의자들의 습성과 비슷합니다. 천재적 발상이라고 추켜세우고, 그런 발상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착각하는 민초들의 결연 한 의지적 기대감이 그런 터무니없는 이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자신도 이해되지 않고 정확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한 위선이고, 자신안에도 정립되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시도가 모순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외식자” 라고 부르셨습니다. 외식은 ‘휘포크라테스’라는 말로 연극 배우가 정확한 진위도 모른 체 그저 대사만 줄줄 쏟아내는 행위를 말합니다. 정치인들은 고도로 발달 된 연기자 즉 위선자들입니다.

그런데 자칫 그런 위선을 쏟아낼 수 있는 위험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직업이 바로 목사요 설교자입니다. 때론 우리가 매주 듣는 설교들이 바로 그런 의미전달방식의 터무니없는 강압적 설득을 기반으로 하지는 않는가 모르겠습니다. 제 자신부터 뼈저리게 돌아봅니다. 듣는 사람들은 일방적인 주입식 방법에 익숙해 그것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으면서 막연히 청종합니다. 의미 전달방식의 설교들이 사람들을 복합적인 종교 집단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성에 노출되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는 교회의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체 생각을 멈추게 하는 무상념의 공간이 되어버립니다. 이유와 궁금증과 질문과 반문이 없어야하는 곳이 되버립니다. 얼마전 한국의 한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평신도들은 얼마큼, 어디까지 훈련되어야 하고 깨워야하는가? 라는 주제로 열띤 논의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쉽게 끝날 토론이 아닙니다. 난상토론이었고, 갑논을박이 초미하게 대립되는 논제였습니다. 결과는 평신도들에게 더 많은 지식과 기회가 제공된다면 목사들의 권위가 위협을 받게될 수 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평신도들의 성장을 억제시켜야한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고 합니다.
목회자들의 두려움은 평신도들이 자신들보다 더 잘 가르치고, 더 인기를 누리고, 더 많은 기회들이 주어지고 심지어는 목사들의 머리위에 올라 올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이 광경은 마치 16세기이후 로마교황청이 모든 성경을 철저히 제한하고 사제외에는 아무도 읽거나 보지 못하도록 차단된 비밀의 문서로 막아 모든 사람들이 읽고 보아야할 말씀을 자신들의 전유물로만 만들어버린 가장 치욕적인 영적 기갈과 어둠의 시기를 연상하게 만드는 이유는 왜 일까요?
평생 평신도를 깨우고자 노력했던 고 옥한흠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그동안 말못할 고민에 빠져 있던 교회지도자들의 고충과 회한이 묻어나는 회의였을 것입니다. 언제부터 교회가 목사중심제, 장로중심제가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교회는 양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정도를 넘어 그 권한이 너무나 비대해졌습니다. 교회는 공존의 법칙이 존재하는 곳이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장로교는 장로들의 교회로, 침례교회는 안수집사들의 힘이 비대해진 교회로, 감리교는 권사들의 교회가 되버렸습니다. 그리고 공히 모든 교단은 목사들이 군림하는 전유물이 된지 오랩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 이라는 명백한 만인제사장으로서의 정당하고 당당한 성경적 권리를 회복해야할 때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권력을 나누는 것도, 권력자가 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섬기느냐! 의 정신이자, 영적 지렛대입니다. 성도들은 더 노력하고 더 말씀을 상고하고 배워야합니다. 더 성장해가기 위해, 영적인 성숙이 예수님 수준에까지 자라도록 힘써야합니다. 성도들 중에서 성령이 충만하고 말씀에 능통했던 초대교회의 두 스타 스데반, 빌립같은 사람들이 나와야합니다. 그들은 경쟁의 대상, 제거대상이 아니라 교회를 부요케 하고, 교회가 성숙해 지는 기회를 제공했던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되라고 가르치지만 그런 사람을 세우지는 않습니다. 설령 사람을 세워도 기회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절대 획일적 이여서는 안됩니다. 다양성이 공존하고 그 다양성안에서 개개인이 존중되어지며, 그 존중은 사명이 되어 세상안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소동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허황된 착각이어도 좋습니다. 저는 이런 황홀한 착각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꿈이되게 하고 싶습니다. 선교지를 보면 수많은 업적과 많은 영혼을 주께로 이끈 선교사들도 있고, 어떤 지역은 평생 한 사람만을 위해 복음을 전한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곳은 한 사람도 아닌 그저 묵묵히 그 땅에 살면서 그 영 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며 살고있는 선교사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사람의 업적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 사람의 충성됨을 보시고 그 사람을 사용합니다. 업적에 치우친 신앙관을 배설물로 버리십시오. 그저 묵묵히 여러분의 자리를 지키는것, 뭐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특별히 목사님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되도, 혹 물질적인 도움을 못주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충성과 공헌도를 사람들이 평가하는 수준 낮은 평가방법에 맡기지 마십시오. 지금,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감당하는 바로 그 일, 그 섬김, 그 마음을 하나님은 천금보다 귀한 것으로 여기시고, 격려해 주시는 분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은 뭐 대단하고 뛰어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교회는 그런 따뜻한 마음,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는 사람, 그 자리가 비지 않도록 눈여겨보고 말없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사람들로 채워질 때 이것이 교회구나! 라는 찬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잎만 무성한 불쏘시게 성도가 아니라 작고 보잘것 없어도 알찬 열매를 맺는 나무로 존재하는 왕같은 제사장 성도가 되십시오. <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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