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하나님의 찢긴 마음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1970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목사이자 미시시피 주 멘덴홀의 흑인지역에 살고있던 공동체 활동가 존 퍼킨스는 백인 경찰관들에게 거의 죽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퍼킨스와 그 경찰관들이 믿는 기독교는 인종차별주의가 그들 사이에 세워놓은 장벽을 허무는데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야만적인 구타를 겪은 뒤로 퍼킨스는 백인들을 멀리함으로써 또 다시 폭력을 당하지 않기만을 바 랐고 이 사건으로 인해 백인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게 되었다. <화해의 제자도28P발췌>아직도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가장 선진화되고, 세계 최강의 나라 한가운데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인종차별주의”란 불명예는 이민자들로 이뤄진 미국이 겪는 가장 심각한 문제이자 숙제다. 백인사회 중심의 미국에 흑인대통령과 그의 내각에 많은 타인종들이 포진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인종갈등과 피해자들의 울분들이 뒤섞여 미국을 정지시키고 있다.

한 방송기사에 따르면 얼마 전 샌퍼드에서 일어난 짐머만 사건으로 인해 흑인사회의 인종차별에 대한 반감은 그 어느때보다 극에 달해있다고 한다. 이번 재판에서 짐머만이 정당방위로 무죄 판결이 난 즉시 미 전역에서 판결에 항의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고 흑인사회가 다시 결집되고 있다. 무죄 판결이 나온 직후 동시간대 시청률 1위인 폭스뉴스의 시청자수는 무려 370만 명이나 뛰었으며 재판 생중계가 끝나고도 ‘짐머만 특수’는 이른 오전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특히 CNN의 경우 오전 9시∼오후12시 사이 시청자 수가 평상시 대비 8배나 뛰었다고 한다.
비단 미국은 흑, 백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원주민들과 백인들간의 문제 역시 심각한 인종차별정책에 의해 배제되고있고 그들의 인권은 말살되어 가고있는 것이 현실의 미국상황이다. 가장 인권을 강조하고 다른 나라의 인권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처하는 미국이 인권에 가장 취약한 사각지대의 문제점을 앉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인디언 선교를 위한 컨퍼러스가 열린 한 모임에서 미국선교사가 인디언 선교의 실패를 시인하고 인디언들이 이제 일어나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후 한 인디언 자매가 단상에 나와 찢긴 자신과 인디언 부족에 대한 마음을 나눈 내용이다.
“우리 부족의 얼굴과 말로 선교를 할 지도자가 필요하다구요! 우리들의 마음과 입술에서 우리들의 언어를 씻어버렸던 당신들이 이제 우리들에게 강요했던 영어가 아닌 당신들이 씻어냈던 언어로 전도 하라구요? 당신들은 얼마나 많은 인디언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입을 씻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당신들에게 땅과 역사를 빼앗기고 언어마저 빼앗긴 채 ‘보호구역’이라는 허울좋은 지역에 갇혀 사는 우리들의 분노를 아십니까? 당신들이 지금까지 인디언 선교에 실패 한것이 얼굴색과 언어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당신들의 선교의 실패는 얼굴색과 언어가 아닌 반성이 없는 교만한 마음, 당신들이 결정하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오만한 태도 때문입니다. … 왜 우리가 복음을 들고 우리를 찾아오는 당신들을 거부하고 적대하는지를 먼저 이해하십시오. 복음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당신들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크리스챤타임즈<03/7/16 B3>에 실린 이 칼럼을 읽다가 그만 이 자매의 찢겨진 가슴의 울부짖음에 눈길이 멈춰버렸다. 우리는 복음을 전한다는 미명하에 상대의 아픔과 상처를 아랑곳하지 않는 일방적 강요를 통해 억지 결신자를 만들고 양상해 내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아프고 찢어지는 마음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말이다.
인종차별은 바로 자신이 우등한 자라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고 열등한 자들은 당연히 그들의 무지에 대한 어떤 행동양식의 규제와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마틴루터킹 주니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권력에서 벗어 날것이 아니라 권력안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정답은 없는지 모르지만 정답에 접근하는 방법이 분명 달랐다는 생각이다. 인종차별은 그 차별을 행하는 사람들의 중심에 “편견”이라는 배타주의가 눈을 가리고 마음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각을 교회안으로 가져오고 싶다. 과연 교회는 이런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정말 차별이 없어야 하는 곳, “편견과 배타주의”가 아닌 “포용과 관용, 그리고 이타적”이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몸안에서 종종 이런 “편견과 배타적인 태도”들을 목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부자와 가난한자, 교회 항존직 직분자들과 소위 평신도라 부르는 사람들, 헌금 많이 하는 부자 성도를 대하는 것과 교회에 공헌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 목사지지자와 반대하는자를 대하는 구별된 태도, 아마 우리의 태도와 반응과 관심은 차별 그 이상일지 모른다.
우리안에 도사리고 있고 버젓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편견과 배타적인 태도를 먼저 단죄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우리가 가진 복음을 가지고 다가가야 하는 많은 영혼들에게 차별주의자가 되고, 우월주의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럴바에는 이런 태도를 가지고 복음이라는 도구로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런 태도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로 새겨져 있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세상이 교회를 차별하는가? 교회가 세상을 차별시키고 있는가? 세상이 우리를 지독한 예수쟁이들이라고 차별할지라도 교회는 결코 세상을 복음으로부터 차별시켜서는 안 된다.
인종차별 전쟁이 한창인 지금 인디언 자매의 외침을 미국사회가 들어야 하고 우리 교회들이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신들의 선교(전도)의 실패는 얼굴색과 언어가 아닌 반성이 없는 교만한 마음, 당신들이 결정하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오만한 태도 때문입니다. 우리 부족을 선교하고 싶다면 먼저 우리들에게 그 답을 물어보십시오. 왜 우리가 복음을 들고 우리를 찾아오는 당신들을 거부하고 적대하는지를 먼저 이해하십시오. 복음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당신들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896/0918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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