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칼럼> 내가 본 옛 마이애미지역 한인사회 (7) 

<김현철칼럼> 내가 본 옛 마이애미지역 한인사회 (7)
왜 내가 국적을 바꿔야 해?

1982년 어는 날, 서울의 동생으로부터 모친(당시 77)께서 낙상으로 입원하셨다는 전화가 왔다. 필자가 미국 이주 후 써 온 모국 민주화를 위한 칼럼들 때문에 당시 한국정부와의 부드럽지 못한 관계였기에 전화만 자주 드렸을 뿐, 8년이 넘도록 귀국할 엄두를 못 냈으니 불효자식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별 도리가 없어 급히 귀국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평소 막역한 친구처럼 지내던 마이애미총영사관의 동갑내기 영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서울 간다구?”, “응, 모친이 입원하셔서…”, “저녁 때 시간되면 꼭 좀 만나”, “무슨 일이야?”, “전화로는 곤란해”, “알았어”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로는 곤란하다?’ 무슨 일인가 궁금했지만 나름 지피는 데가 있었다.
동포식당 한 구석에서 이 분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김형, 미국 온지 오랜데 미 시민권은 가지고 있겠지?”, “아니, 아직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그래? 모친 병환이 위급하지 않으시면 시민권 수속이 오래 걸리지 않으니 아주 받아 가지고 나가지”, 역시 그거였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필자는 짐짓 “왜 그래야 돼?”했고 이 분은 필자가 추측했던 대로 말을 이어갔다.
“한국 국적자와 미 시민권자를 대하는 정부(한국)의 자세가 달라서 국적을 바꾸지 않고 귀국하면 김형의 경우 불편할 수 있어, 김형이 그동안 여기 저기 신문에 쓴 칼럼이 국내 정보기관에 낱낱이 비치돼 있다고 봐”했다.
이어 그는 “미국 여권으로 귀국하기 전날 미리 전화로 서울 가족에게 며칠 몇 시 무슨 비행기로 서울 공항 도착 예정을 알리고 당일 집에 들어 올 시간이 훨씬 지나도 안 들어 올 경우 가족들이 주한미대사관에 미국시민인 기자 아무개가 공항에 도착한지 얼마나 됐는데 행방불명이니 찾아달라고 전화하면 알아서 처리해 줘, 하루 후면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그게 미국 시민권자가 갖는 특혜지”했다.
이 친구와 술을 몇 잔 더 기울인 후 필자의 신변을 위해 자상한 충고를 해 준 데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필자는 다음 날 즉시 미 시민권 신청 수속을 했다. 미 영주권 취득 만 5년이 지나면 시민권 신청이 가능했으니 필자의 경우 당시 영주권을 가지고 미국에 온 처지여서 이미 오래전에 시민권을 받았을 것을 ‘왜 내가 국적을 바꿔야 해?’ 하는 생각으로 미 시민권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국적을 바꿔야만 귀국할 수 있는 현실이 됐으니 서글픈 일이었다.
하긴 이민 후 줄곧 뉴욕,워싱턴,엘에이,필라델피아,마이애미,애틀랜타,토론토(캐나다), 등 동포신문에 모국 군사독재의 인권유린 내용을 질타하는 칼럼을 얼마나 써왔던가.

그 후 약 한 달이 지났을까? 오랜만에 뉴욕 동포 언론사 사장으로 있는 동갑내기 친구(전 서울 모 언론사 사회부장)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안부 차원의 느긋한 전화와는 달리 흥분해서 속사포를 쐈다.
“야, 너 미 시민권 없으면 귀국하지 마, 미 시민권 없이 귀국했다가 이번에 나 혼났어. 폭행은 당하지 않았지만 공항에서부터 끌려 가, 1주일간이나 붙들어 놓고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을 하며 괴롭히는데 미치겠더라고, 너도 알지만 나야 미국신문을 번역해 보도한 죄(?) 밖에 없는데도 그 정도니 모두가 창작한 칼럼을 쓴 너는 한 달 깜이야, 뉴욕공항에 내리자마자 너에게 알려 주려고 전화한 거야.” 했다.
역시 이곳 공관 영사의 충고가 옳았던 것이다.
그밖에 이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그곳(정보기관) 벽에는 가나다 순으로 이름이 적힌 큰 서랍들(‘요주의 언론인’ 파일)이 비치돼있는데 자기 파일에는 자기가 보도한 기사 전부가 하나도 빠짐없이 정리 돼 있어 놀랐다고 했다.
필자가 “그렇지 않아도 지금 미 시민권 수속 중”이라고 했더니 “됐어! 그럼 궁금하니 돌아와서 전화해 줘”하고 끊었다.

6개월 후 미국 여권으로 서울공항에 내리자 그래도 혹시 누가 미행하지 않나 불안으로 긴장했다.
아직은 아무 징후가 없어 불안해하는 동생의 차로 집을 향하고 있는데 역시 뒤에 검은 찦차가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필자는 불안한 마음으로 동생에게 “뒤 좀 봐, 저거 기관원 차 맞지?” 동생은 슬쩍 돌아보고 나서 “미국까지 가서 조용히 살지 뭣 때문에 그런 글들을 써서 이 지경을 만들어요?”했다.
“국내에서 동생처럼 교수 생활을 하자면 정부 눈치 보느라 죽어지낼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기자가 자유의 나라에 살면서 모국의 인권유린을 못 본척한다면 그게 올바른 언론인의 자세일 수는 없지” 하고 동생을 다독였다.
검은 차가 필자를 연행하려 했다면 공항에서 할 일이지 왜 미행은 하는 거지? 궁금했다.
줄곧 따라 오던 검은 차는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오던 길로 되돌아섰다.
직접 연행은 못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거처를 확인하는 것이었을까? 그 말은 이미 필자가 미 시민권자가 되었음을 기관원들이 정보 보고를 통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서울 체재 1주일 후 공항에서 검색대를 나올 때까지 혹시 기관원이 필자를 찾지 않나 조바심이 일었으나 별 일없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국적을 바꾼 값을 한 것일까?
미국 도착 후 공관 영사로 있는 친구에게 술을 사며 다시금 감사의 뜻을 표했다.
어느덧 국내에서 중진 수필가가 된 이 친구는 국내에서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로 활동 중 그동안 수필집도 세 권이나 출판했는데 마이애미 공관이 폐쇄될 때까지 19년 동안 지나간 많은 외교관 중 현재까지도 필자와 친교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계속) <플로리다자연치유연구원장> kajhck@naver.com  <866/201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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