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칼럼> 내가 본 옛 마이애미지역 한인사회 (5)

<김현철칼럼> 내가 본 옛 마이애미지역 한인사회 (5)
주미 대한민국 총영사들의 이모저모

이 분들은 술을 권하면서 필자에게 질문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한 분의 질문 후에 필자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어 다른 분의 질문이 잠시의 간격도 없이 순서대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이 분들이 미리 짜 놓은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분들이 놀라는 표정을 짓기 시작한 것은 필자가 큰 잔으로 정종을 가득 부어 여덟 잔을 마시고도 끄떡 없이 질문에 또박또박 명쾌한 대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부터다. 어느 분이 “아니, 웬 술이 그렇게 세요?” 하기에 “기자생활 하려면 술이 약해선 안 되죠”라고 능청을 떨었다. 실은 평소 정종은 맥주잔으로 두 잔 정도면 취기가 오르는 게 필자의 술 실력이었으나 이 날은 너무 긴장한 탓으로 그 네 곱을 마셨는데도 멀쩡했던 것이다.
질문 내용은 필자가 듣기에 모두가 유치한 것들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역시 이 모임의 ‘보스’가 담당했다. 아무 “고위 공직자가 많은 돈을 주었다는데 사실인가?” 필자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터무니없는 내용인지라 속으로는 ‘이런 몹쓸 사람들!’ 하면서도 한 술 더 떠서 “기자란 주는 돈을 조건 없이 받되 그 돈으로 기사를 없애거나 축소시켜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만일 그럴 자신이 없다면 처음부터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게 기자세계의 불문율이다, 그래서 나도 그 고관이 수표가 아닌 현금 10만달러(현재 화폐가치로 보아 30만~40만달러?)을 주기에 그냥 조건 없이 받았지만 기사 보도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뭐가 잘 못됐나? 한가지, 앞으로는 기자의 부정 내지 불의의 내용을 확인하려면 증거부터 확보한 다음 이런 자리를 마련해야지 소문 운운하면 실없는 사람이 된다”고 장광설로 능청을 떨었다.
허를 찔린 ‘보스’는 “허허… 몇 천달러라면 곧이듣겠지만…” 하면서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제야 필자는 “집에 돌아갈 택시비 정도는 상대방의 호의로 받되 그 이상 기자가 돈을 받는다면 그건 사이비기자다, 그런 질문은 평소에 돈을 밝히는 사이비 기자들에게나 통할 내용이다”고 호통을 쳤다.

이때까지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필자를 적대시하는 표정으로 일관하던 신임 회원의 얼굴이 필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밝아지며 필자에게 호감을 갖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마 사전에 필자에 대한 악선전을 많이 들었다가 막상 현장에서 확인한 기자의 이미지는 그게 아니었다는 것일까? 그래선지 마지막 이 분의 차례가 왔는데도 이 분은 이미 여덟 잔이나 마신 필자에게 술을 끝내 권하지 않았다.

‘없는 말을 날조해서’ 기자의 기를 꺾으려드는 치졸한 자세에 오히려 10만 달러라는 엄청 난 액수를 받았다고 나오니 이 분들이 기가 찼을 것이다. 신입회원은 이제 필자를 대하는 자세가 확 바뀌어 언행이 다른 분들처럼 거칠지 않고 겸손하고 친밀감마저 느끼게 했다. 점잖은 이 분은 어쩌다가 끼어서는 안 될 자리에 낀 게 분명했다.

그 후에 들리는 소문에는 필자가 약 1시간이 지나서 현장을 떠나자 이 분이 ‘8인회’ 멤버들에게 “김기자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호락호락 불의와 타협할 사람이 아니니 앞으로는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말라”고 충고를 했다고 전한다.
이 자리에서 나왔던 또 다른 질문은 자기들이 죽도록 싫어하는 기업인(후에 상공회의소 회장이 됨)의 이름을 대면서 “왜 신문을 한다면서 공평치 못하게 누구와만 친해서 만날 그 사람 집에만 놀러 다니고 자기네와는 어울리질 않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속으로 ‘유치의 극치로군’하고 생각하면서, “기자는 친한 친구가 있으면 안 되나? 기자는 누구 집에 놀러 가면 안 되나? 그런데 어쩌지? 여러분이 나를 초청한 적이 없어서 어울릴 기회가 없었던 것처럼 사실은 그 분 집이 어디인지 나도 몰라서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걸 기자에게 질문이라고 하다니 최고 학부를 나왔다고 하는 여러분들에 실망했다,
질문 내용들이 모두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조작된 것들이거나 너무 유치한 것이어서 술 맛이 안 난다”고 했더니 질문한 분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렇게 7~8건의 질문이 있었지만 너무 내용이 시시해서 잊은 지 오래 됐고 30여년이 지난 지금 위의 두 질문만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날, 이 자리의 목적은 ‘회칙 날조 사건’까지 보도해서 자기네를 궁지에 몰아넣은 기자에게 어떻게 하면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생각 끝에 필자에게 잔뜩 술을 먹여 놓고 무슨 약점이라도 잡아서 기를 꺾어 놓아야겠다는 것, 또 일단 만나 이 고장 동포사회에서 힘(?)깨나 쓰는 자기네들이 둘러싸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 겁을 먹고 필자가 꿀려 들어와 자기네와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꼼수를 부린 듯 했다.

드디어 1979년 마이애미에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신설(1998에 폐쇄) 되면서 이곳 동포사회에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완전히 한인 사회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8인회’ 멤버들 중에는 이 모 총영사(중앙청 국장급)의 모 고등학교 후배들이 몇 명 있었는데 선배 공관장을 이용해 총영사관이 주최하는 공적행사에서 한인회 인사들 보다는 ‘8인회’ 멤버들이 항상 동포사회의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빼앗긴 한인사회를 공관장의 빽으로 자기네가 되찾자는 술수를 부린 것이다.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자 필자는 총영사를 만나 그동안 이곳 동포사회에서 해 온 ‘8인회’의 행패를 소상히 알려 주면서 다시는 한인 사회가 그들로 인해 옛날로 후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인정 면에서 후배들에게 약했던 총영사는 그 후도 전혀 달라지지를 않았다. 미국 내 교민 사회로는 아주 조그마한 ‘플로리다 지역 동포신문이라니 무시해도 돼’하는 자세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 이 공관장은 평소 말 수가 너무 많아서 자주 문제를 일으켜 오던 중 또 다시 동포 여성들에게 말을 크게 실수해서 까싶 거리를 제공한 일이 발생했다.
워싱턴디씨의 ‘한국신보’에 까지 까싶으로 이 분의 실수가 보도되자 당시 김 모 주미대사(장관급)는 이 공관장에게 전화로 ‘신문 기사를 봤다, 말을 조심하라’는 훈계를 했던 모양이다.

직속 상사로부터 꾸중을 듣고서야 정신이 든 이 공관장은 즉시 필자에게 전화를 했다. “대사님의 전화를 받았다”면서 “앞으로는 잘 할 테니 제발 좀 잘 봐 달라”고 했다.
그 때 필자는 “공관의 설립 목적대로 교민 보호에 충실하면 되지 않겠나? 전 번에 만났을 때 충고했지만 모처럼 건강하게 흘러가고 있는 교민 사회의 흐름을 사사로운 인정 때문에 역행시키려는 공관장의 언행은 모국 외교관의 월권행위다. 이 고장 동포 사회를 어렵게 민주화시킨 언론이 아직 살아 있다”고 신문의 또렷한 자세를 알려 주었다. (계속) kajhck@naver.com <864/2013-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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