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칼럼> 내가 본 옛 마이애미지역 한인사회 (3)

<김현철칼럼> 내가 본 옛 마이애미지역 한인사회 (3)
엄청난 실수, ‘오보’ 사건

<‘약 40년 전의 동포사회’라는 글 제목을 ‘내가 본 옛 마이애미지역 한인사회’로 고친 이유는 글을 쓰다 보니 약 40년 전에 이어 20 년 전 까지 이어졌기 때문임을 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한다.>

‘우리소식’을 발행하면서 한 가지 크게 실수한 오보 내용을 이번 기회에 고백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필자의 여생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각 때문이다.
아직은 이 나이(77)에도 비타민 이외의 혈압, 당뇨, 콜레스테롤, 진통제 등 어느 약도 필요 없이 살고 있지만 조만간 필자에게도 다른 노인들처럼 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오지 않겠는가. 특히 요즈음 노인층에 흔한 치매 현상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게 현실이니 정신이 온전할 때 남길 말은 남겨 두어야 후회 없이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플로리다 전 지역의 동포들을 위해 열심히 ‘우리소식’을 만들고 있을 때 갑자기 북쪽 어느 도시의 동포로부터 전화 제보가 있었다. “장사하는 아무개 청년이 돈이 궁해지자 동포 의사 한 분을 납치해서 협박 중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 피해자는 이번 일로 돈을 빼앗기거나 몸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타격이 크며 이로 인해 조그마한 동포사회가 발칵 뒤집혔는데 현장에 와서 취재해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우선 필자가 놀란 것은 이 분이 말한 가해자의 이름이 필자가 잘 아는 고등학교 10여년 후배인데다 평소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닌 것으로 믿어 왔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영세성을 면치 못했던 당시의 ‘우리소식’은 그 멀리(550마일)까지 가서 현장 취재를 할 만큼의 시간 여유도 재정능력도 없었기에 현장 취재는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한 후 속보가 있으면 알려 달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곧 이어 사건을 확인하기 위해 제보자가 준 전화번호로 피해자와 대화를 두어 차례 시도했으나 심적 충격 때문이었는지 전화를 전혀 받지 않았다.
조금 후 문제의 고등학교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배님, 지금 경찰서에서 잠깐 틈을 내어 전화를 드립니다. 혹시 제 사건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돈을 빼앗을 목적으로 동포 의사를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고 있습니다. 실은 친구 사이라 돈을 빌리기 위해서 그 분을 만나려고 한 것인데 누군가가 저를 납치범으로 신고한 것입니다. 만일 신문에 기사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저의 어린 자식들이 받는 충격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배님, 제발 저의 아이들을 봐서라도 선처해 주세요.”하며 퍽퍽 울었다.
이 사건에서 필자가 크게 실수했던 것은 거리가 많이 떨어진 현장까지는 못 가더라도 끈질기게 전화 취재라도 제대로 해서 사실을 보도했어야 하는데 평소 가까이 느끼던 후배의 울부짖음에만 정신이 팔려 가해자는 등한시하고 피해자가 주장하는 내용을 위주로 보도하고 만 것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스스로가 이해가 안 가는 창피한 일이 벌어졌다.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하고서도 자신이 올바른 기자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더구나 사실과 반대되는 내용의 기사를 읽은 피해자와 그 지역 동포들의 실망에서 오는 울분은 무슨 말로 다 표현하겠는가?
그 후 필자는 오랜 기자 생활 중에 있었던 가장 큰 이 오보 사건을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마음속으로나마 당시의 피해자 가족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후 가해자는 징역형을 받아 피해자의 원한이 풀렸겠지만 형기를 마치고 나온 후, 그의 ‘울음 속의 속임 수’에 빠져 동포사회에 못할 짓을 저지르고 만 필자와는 마음속으로부터 소원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그 사건이 마이애미 지역에서 벌어졌다면 가해자가 필자의 후배 아닌 친인척 관계였더라도 현장 취재 내용을 뒤집어서 쓸 수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지금 와서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마이애미 지역에서 삼각관계로 빚어진, 미국 청년(M대 재학생)의 연적(동포 청년) 살해 사건 당사자(당시 만 21세의 M대 한인여학생)의 부친이 필자의 고등학교 2년 후배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던 사이었음에도 오직 기자의 사명감으로, 여학생과 그녀의 부친까지 실명을 밝혀가면서 현지 미국 신문에 보도된 기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상세한 심층 보도를 한 결과, 그토록 가깝던 필자와 후배의 사이가 멀어지고 만 사실은 앞의 납치미수 사건의 오보와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할 것이다.
당시의 피해자와 제보자가 오래 전에 다른 주로 이사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안 다면 지금이라도 찾아가, 그 분들이 용서를 하든지 안 하든지 상관없이 진심으로 그 때의 잘 못을 빌고 싶을 뿐이다.
이 오보 사건을 계기로 신문제작 내지 기사 취재 때는 ‘항상 약자 편에 서서 확인 또 확인’ 그리고 ‘친자식이 사기를 쳤을 때도 제3자의 자세로 냉정하게 기사화해야 한다’는 ‘철저한 기자 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었으나 필자가 유명을 달리 하는 그 날까지 필자의 40년 기자 생활에서 가장 큰 얼룩으로 남은 이 오보 사건이야 말로 두고두고 필자를 부끄럽게 하는 ‘주홍글씨’가 된 것이다. (계속)
kajhck@naver.com (플로리다자연치유연구원장) <201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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