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칼럼> 약 40년 전의 마이애미지역 동포사회 (1)

<김현철칼럼> 약 40년 전의 마이애미지역 동포사회 (1)

마이애미 북쪽 교외 도시의 미국 의사 클리닉에서 침술사로 근무한지 한 달이 지났을 때인 1974년 6월 어느 날, 서울에서 지난 10년간 긴장 속에서 살아 온 “기자 생활을 완전히 접고 이제 남들처럼 좀 느긋한 삶을 택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가장 기뻐했던 것은 바로 아내였다. 그 말이 못 미더웠는지 아내는 “정말?”하고 반문했고 필자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야 활짝 웃었다. 아내 역시 남편의 스트레스가 연속되는 생활이 싫었으리라.
이민 생활이 시작되고 얼마 후 마이애미 지역 한인회 주최 광복절 기념행사 및 한인회 총회가 모 대학 강당에서 열린다기에 많은 동포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 교회에서 만난 동포 한 분의 차에 편승, 현장에 가 보았다.
당시 이 지역 전 동포 수가 3백여 명이라는데 현장에는 백여 명이나 되는 동포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1년에 한 번 씩 모이는 동포들의 행사라더니 동포들의 얼굴이 그리워 한 가구에 한 분 씩은 이 자리에 나왔구나 싶었다. 그 당시만 해도 오늘날의 한인체육대회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 한 때였다.
식장의 강단 위 벽에는 광복절 기념식 및 한인회 총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크게 걸려 있었다.
행사 약속 시간이 거의 30분이 지나서야 점잖게 생긴 40대 신사(후에 알고 보니 현직 의사요, 한인회 이사라 했다)의 사회로 식이 열렸다. 남의 나라에 와서 처음 부르는 애국가 합창 때는 전례 없이 가슴이 뭉클했다.
광복절 기념식이 간단히 끝나고 총회가 열리면서 그간 결원이 된 두 분의 이사 보결 선거 순서로 넘어갔다. 그런데 회원들의 추천 절차도 없이 누군가에 의해 미리 지명된 분들의 명단을 사회자가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여러분, 반대하시는 분이 없으면 박수로 두 분을 이사로 추대해 주세요”하는 것이었다.
거수로 가부를 묻는 것도 아니고 몇 분의 찬성자만 박수를 쳐주면 그 수가 10%가 되건 더 많건 상관없이 통과시킨다는 식이었다.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대 발언을 하는 분이 없는 상태에서 그냥 가벼운 박수 소리가 났다. 박수치는 분들의 수가 몇이나 될까를 따질 겨를 도 없이 사회자는 재빨리 두 분이 이사로 선출되었다며 강단 위로 올라 와 달라고 요청했고 그분들은 나와서 회원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필자는 이 때 “전 세계에서 민주정치가 가장 잘 되어 나간다는 미국에 살면서 하는 짓은 어쩌면 국내 정치와 그렇게도 닮았지?”하고 탄식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박정희의 유신체제로 중앙정보부(부장 김종필)가 만들어낸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 단체를 통해 장충체육관에서 96%의 절대다수의 지지로 박씨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였기에 이날 일어난 사건이 국내의 군사독재를 연상시켜 마음이 착잡했다. 필자야 말로 그 독재체제가 싫어서 미국으로 도망(?)온 장본인이 아닌가.
이날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동행한 분께 “한인회 총회에서 회원들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자기네가 마음대로 정한 분들을 이사로 세우더군요. 회칙이 그렇게 되어있나요?”하고 불만스런 말을 던졌다.
이 분의 대답은 “회칙이야 다른 한인회처럼 잘 되어 있지만 먹고 살기 바빠서 들 그런데 신경 안 써요, 마음속으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워낙 동포 사회의 거물급들이라 누가 그 분들을 상대로 나서서 잘 못을 지적할 엄두를 못 내죠.” 했다.
순간 ‘그 분들’이라는 존재가 쥐 세계의 고양이를 연상시키면서 ‘고양이의 목에 방울 달기’라는 ‘이솝’ 우화가 머리를 스쳤다.
필자는 이때부터 이 곳 동포사회에 관심이 가기 시작하면서 얼마 후 한인사회를 자기네들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거물급’의 성분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이 오래 전에 미국에 온 30~50대의 인물들로 멤버 수는 8명, 특히 서울의 A명문 사립대 출신 의사와 동창들이 그 중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미국에서 동포들이 가장 높이 바라보는 직업인 의사들이 이곳 동포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 그룹의 ‘보스’의 나이는 다른 멤버들보다 위이지만 고등학교가 최종학력임에도 대학 출신들로 이루어진 조직을 지배하는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었고 전 회원들에게 친 동생 대하듯 반말을 쓰고 있었다.
즉, 이 지역 동포사회에서는 유일한 사조직(이 후 편리하게 ‘8인회’라 부름)의 ‘대부’였던 셈이다. 이번 새로 선출(?)된 신임 이사 두 분도 ‘8인회’ 멤버들과 평소 가까이 지내는 인물들이었다.
필자가 더욱 놀란 것은 한인회장은 ‘8인회’ 멤버들만이 돌아가면서 차지한다는 불문율이 동포사회에 자리 잡은 이래 서울의 명문 B 국립대 출신 의사들은 뒤늦게 미국에 온 죄(?)로 그 그룹에 낄 수도 없었고 한인회 이사니 회장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그 날 밤 필자는 비민주적인 이곳 동포사회의 행태를 바로 잡을 방법은 없을까 연구하느라 잠을 설쳤다. (계속) kajhck@naver.com <20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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