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12> 마지막회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12> 마지막회

▲동아일보에서 3월말 발간한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의 표지. <가격 9,000원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12> 마지막회

“나는 늙어서 셋째 놈과 살겠소”

▲필자 김현철
▲필자 김현철

영랑의 다섯 아들 중 셋째가 어릴 때, 어른들이 보기에는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던가 보다.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셋째는, 다섯 살 때부터 집 안에서 뛰어 놀다가 눈에 조금만 달리 보이는 물건이 발견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작은 못 한 개까지도 주워다가 자신의 전용 서랍 속에 보관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그 서랍 속에는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한 셋째의 버릇을 알고부터 영랑은 무엇이든 집안에서 잃어버리면 즉시 셋째의 서랍을 뒤져 분실한 물건을 찾아내고는 “이럴 줄 알았어! 이놈은 틀림없는 살림꾼이야!” 하며 만족한 표정을 짓던 기억이 새롭다.
아랫마을에 심부름을 보낼 때도 당시 아홉 살, 열세 살 된 두 형들을 제쳐 놓고 고작 여섯 살 된 셋째에게 시켰는데 후에 심부름을 전달받은 쪽에서 애당초 아버지가 시킨 그대로 한 마디도 빠트리지 않는 똑똑한 아이라고 칭찬해서 영랑을 기쁘게 했다.
셋째가 여섯 살 때의 일이다. 무더운 여름 날, 윗옷은 벗고 반바지만 입고 집안에서 노는데 아버지가 셋째의 아랫배를 주시하면서 아버지 앞으로 오라고 부르셨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이 자식 아랫배가 왜 이렇게 불룩해. 이상하지?” 하며 둘째 손가락으로 배꼽에서 두세 치 밑 단전 부위를 꾸욱꾸욱 눌렀다. 그러면서 새로운 걸 발견이나 한 듯 “아니! 이 자식 아랫배가 왜 이렇게 단단해? 돌덩이 같네, 여보, 이 놈 배 좀 눌러 봐.” 했다.
어머니도 배를 만져 보더니 “글쎄? 너 혹시 배가 아프냐?”고 물었지만 셋째 자신은 전혀 이상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버지는 혹 셋째에게 무슨 병이라도 있나 해서 계속 관심을 두었다.
얼마 후 셋째의 배를 다시 눌러 보던 아버지 영랑은 어느 한의사의 말을 인용하면서 어머니께 “여보, 나 늙으면 셋째 놈과 살겠소, 아랫배가 이렇게 단단한 놈은 건강이 월등하다고 합디다. 어느 놈보다도 이놈 건강은 믿을 수 있소. 특히 이놈은 살림꾼이 될 놈이니 한 세상 잘 살 것이오.” 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고서 70년의 세월이 흐른 2010년 현재, 형제들 대부분이 부모님 곁으로 떠났고 아들로는 3남과 5남만 남았다. 그 후 셋째는 76세가 된 오늘날까지 아버지 말씀대로 남다른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 당시의 한의사의 말이 옳았던 것일까?
너무 어렸을 때 부친을 잃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막내(1940~ )는 독문학을 전공한 덕분에 40여 년간 유럽 오스트리아에 살면서 현지 국립은행의 전산부장으로 재직하다 은퇴, 그곳에 영주할 계획이니 실제로는 3 남만이 아버지 영랑의 발자취를 올바로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셈이다.
후배 문인들이 확실한 근거도 없이 영랑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미화 또는 폄하하는 행위라든지, 사실이 아닌데도 영랑이 자신의 ‘최 측근 인물’이었던 듯이 세상을 속이는 짓 등도 셋째의 기억이 또렷할 때 바로 잡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랑 생가를 옛 그대로 복원하기 위한 고증을 비롯해 ‘한국시문학파기념관’ 건립을 위한 아홉 분 동인(김영랑,김현구,박용철,변영로,신석정,이하윤,정인보,정지용,허보)의 저서, 사진, 유품 등 수집도 셋째의 임무다.

▲영랑 시 대부분이 탄생한 생가 사랑채.1943부터 1997까지 우아한 기와집이었으나 신중치 못했던 강진군의 실수로 초가로 바뀜.

▲영랑 시 대부분이 탄생한 생가 사랑채.1943부터 1997까지 우아한 기와집이었으나 신중치 못했던 강진군의 실수로 초가로 바뀜.

셋째가 오랫동안 생가를 방문하지 못했다가 2006년 ‘제1회 영랑문학제’ 때 와서 생가를 둘러보고 깜짝 놀란 것은, 1943년에 영랑이 직접 사랑채 초가지붕을 기와로 바꿔 1997년까지 유지되어 왔는데 이 기와지붕이 어느새 갑자기 초가로 바뀌어 기와집이 지녔던 아름다움을 상실해 버린 탓이다.
기가 찼던 셋째가 당시 강진군 담당 과장 등 알 만한 분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으나 결론은 신중치 못했던 군 당국의 실수로 밝혀졌다. 평소에는 서울 거주 유가족들과 계속 연결을 해 오다가 왜 기와집을 초가로 바꾸는 문제만은 전혀 유가족과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을까? 원망스러울 뿐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영랑 생가

▲높은 곳에서 바라본 영랑 생가

영랑 생가는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로 강진의 자랑거리 중 하나이기에 강진군민 모두가 원형 유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유가족들이 걱정하는 이유는 예전과 달라 이제 우리는 일류 한옥 건축기사를 찾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류 기사가 아니고는 옛 지붕 용마루의 곡선을 원형 그대로 복원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제 잃어버린 문화재의 가치를 되살릴 길이 없어졌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그리고 ‘향토문화관’ 안에 ‘영랑문학관’이 있음을 모르고 영랑 생가 방문객들이 거의 다 그냥 지나쳐버리는 점을 시정하기 위해 최근 ‘향토문화관’ 간판을 ‘영랑 현구 문학관’과 ‘향토미술관’ 등 두 개의 간판으로 바꾸어 내걸게 했다. 그 후 방문객 수가 많이 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영랑 시의 난해성을 고려해서 처음으로 영랑시 전편 해설전문 서적이 출판되도록 유도하는 한편, 이미 발행된 베트남어 판 이외에도 영문과 일본어 번역판 시집이 나올 수 있게 했으며, 출판사가 영랑시집을 출판할 때는 난해한 시어를 전편 감수해 줌으로써 독자들의 시 해석에 도움을 주는 일 등 셋째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또 요즘 자주 강진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좀 더 친절히 맞이하기 위해 강진군에서 한식을 영문으로 풀이 한 《한정식 한영사전》을 만들어 군 전역 요식업소에 배포하게 한 일도 지역 경제 발전을 돕는 일일 것이다.
이 밖에도 그동안 강진에 사는 문인이 아닌 사람들 위주로 운영되어 오던 ‘영랑기념사업회’를 2009년 12월, 뒤늦게나마 유명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체제로 발돋움시키면서 ‘영랑’의 이름에 걸맞게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 발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제는 전체 문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음은 물론, 지역 발전을 위해서도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음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 속의 ‘홍길동’ 등을 활용해서 해당 지자체가 몇백 억씩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예는 제쳐놓고서라도. 강진읍 인구(약 1만 5천)의 3분의 1 수준인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인구 약 5200명)의 ‘이효석문학관’의 경우를 보면, 설립 이전(2000년도)에 비해 방문객이 20만에서 250만(2008년)으로 12배 이상 늘었고, 그에 따르는 수입 역시 연간 400억 원을 오르내리고 있다. 강진의 경우 전국적인 인지도를 지닌 ‘영랑’의 이름을 활용한다면 봉평면보다 전망이 훨씬 밝다는 것이 다른 지역 문학관 관계자들의 전망이다.
무(無)에서 오늘날의 ‘이효석문학관’을 일궈 평창군의 효자로 만든 ‘효석문학선양회’처럼, 이제 ‘영랑기념사업회’도 영랑을 활용해서 머지않아 강진 군민들은 물론 강진군청의 거대한 버팀목을 만들어 낼 때가 올 것을 확신한다.
셋째가 열여섯 살 때, 6·25전쟁이 아버지 영랑을 앗아 갔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도 그의 시와 생가, 문학관, 그리고 ‘영랑을 사랑하는’ 수많은 후배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으니 “……나는 사라져 저 별이 되오리……”(‘좁은 길가에 무덤이’ 중에서) 하고 노래했던 것처럼 영랑은 이렇게 ‘별이 되어’ 젊은 날에 희망했던 그대로 ‘셋째 놈’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끝> 201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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