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10>

▲동아일보에서 3월말 발간한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의 표지. <가격 9,000원>

▲동아일보에서 3월말 발간한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의 표지. <가격 9,000원>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10>

납북은 면했으나 끝내 북의 포탄에 쓰러지다

▲필자 김현철
▲필자 김현철

이승만 대통령의 결사반대를 무시하고, 미국은 1948년 전투기 한 대도, 탱크 한 대도 없는 그야말로 방위 태세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우리 국군에게 국토 방위의 임무를 맡긴 채 남한에서 주한미군 병력을 일본으로 완전 철수시켰다.(《한국전쟁비화》 1권, 안용현 저)
1949년 3월, 북한의 대남 침략을 위한 엄청난 군비 증강 실태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던 맥아더 장군(당시 미극동군사령관)이 미 극동방어선에서 한국이 제외된다는 내용을 암시하는 기자 회견을 했고, 이어 1950년 1월에는 에치슨 미 국무장관 역시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반도는 제외된다”고 공식성명(《한국전쟁비화》 1권)을 발표했다.
그리고 수개월 후인 6월 25일, 김일성은 이제야 무력남침으로 적화통일이 가능해졌다고 확신하고, 그간 열심히 남침 준비를 해 온 탱크 242대, 항공기 200대 등을 포함한 어마어마한 군 장비를 총동원하여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남한을 침공했다.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자, 미국은 맥아더나 에치슨이 언제 그런 성명을 발표했느냐는 듯 아니, 북한군이 남침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즉각 주일 미군을 출동시켜 전쟁에 개입했다.
만일 미군의 즉각 개입이 없었다면 부산까지의 북한군의 점령은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피해자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미군 철수나 맥아더-에치슨 성명 같은 것이 없었다면, 그래도 북의 남침이 가능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는다.
휴전이 된 후 당국의 통계를 보면 3년간의 전쟁으로 시인 김영랑을 포함해서 남북한 군과 민간인 등 동포 400만 명이 희생을 당했다. 이렇게 김일성은 민족 역사에 씻지 못할 죄를 짓고 만 것이다.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고 파죽지세로 남진하자, 영랑은 사흘 후인 6월 28일 새벽, 서울 북쪽 창동까지 인민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족과 떨어져 맥고모자를 깊이 눌러 쓰는 등 농부 복장으로 변장한 뒤 신당동에 있는 친척 김형식 아우(일본 메이지대학 수업, 강진읍 서문안 출신) 집으로 피신했다.
인민군이 총부리를 들이대고 동네 청년들을 앞세워 영랑을 잡으러 자택으로 침입했던 것이 바로 서울 점령 뒷날 새벽이었으니 영랑은 제때 피신했음이 분명했다.
영랑이 이미 도피하고 없자 인민군은 방안을 철저히 수색한 끝에 쌀 등 각종 식품과 재봉틀 등 중요 가재도구들을 강탈해 갔다.
“쌀 한 톨도 안 남기고 가져가면 우리 식구들은 뭘 먹고 사느냐?”는 가족들의 울먹임에 이들은 “곧 공화국에서 배급을 줄 테니 걱정 마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반도 적화통일 정책을 지지했던 남로당 계열의 각종 신문, 잡지, 주간지 등을 뿌리 뽑으려고 총력을 다했던 대한민국 공보처 초대 출판국장 경력자니 북한 측으로서는 정치적으로 영랑을 납북 우선순위에 두었을 것이다.
남하하지 못한 서울 시민들은 7~8월의 찜통 더위와 불안한 정세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영랑은 시국이 답답할 때마다, 후에 피난처로 합류한 아들들을 데리고 찬 폭포수가 쏟아져 내려오는 세검정으로 나가 남쪽으로 피난하지 못한 문인들 몇 분과 피서 겸 상호 정보 교환을 위해 비밀리에 만났다.
이러한 만남에서 국군의 전쟁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미군 완전 철수 감행, 맥아더-에치슨 성명, 북한군 남침, 예상 밖의 미군 출동 등 교묘하게 흘러가는 정세를 분석한 뒤 “서울은 반드시 수복된다, 그러나 병 주고 약주는 미국을 더 믿어서는 안 된다.”는 등의 결론에 이르러 그 자리에 모인 문인들끼리 공감대를 형성했다.
당시 각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영랑의 자식들은 이러한 문인들의 정세 분석을 귀동냥 하고서야 ‘6·25’라는 동족 간의 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었으며, 또한 한일병합 당시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따른 미국의 역할이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훗날에 알게 되었다.
9월 28일 서울을 빼앗긴 지 석 달 만에 국군과 미군이 90퍼센트인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한 끝에 드디어 서울 탈환 작전에 성공했다. 영랑의 집이 있던 서울 신당동 앞길에서도 탱크를 앞세워 북진하고 있었다.
서울 시가전에서 패하고 북으로 퇴각하던 인민군은 쉴 새 없이 서울 시내 민가에 포탄을 날려 희생자가 속출했다. 이때 영랑은 처자식을 비롯해, 친척집 식구들과 함께 포탄을 피해 그 집 지하 방공호 속에서 지내면서도 틈나는 대로 북진하는 국군의 믿음직한 모습을 보려고 태극기를 들고 잠깐씩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곤 했다.
오후가 되자 집에 방공호가 없는 이웃 부인들이 북한군의 포탄을 피해 아이들을 데리고 이 집 방공호로 자꾸 몰려들었다. 차차 빈자리가 없어지자 영랑은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하필이면 그때 가까이 포탄이 떨어지면서 팔과 배 등에 포탄 파편이 박혔다.
시내 의사들은 모두 군의관으로 전쟁터에 나가버리고 군을 피해 조용히 숨어 있던 한 내과 의사를 만나 치료를 부탁했다. 내과의사의 눈에는 별 것 아닌 경상이었다. 그는 고작 살균제 머큐로크롬 정도를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 주면서 안정하면 며칠 내에 완쾌된다고 했다. 그러나 복부 깊숙이 들어가 박힌 포탄 파편들이 복막염을 일으키며 병세를 악화시켜 영랑은 결국 다음 날인 29일 짧은(만 47세) 인생을 마감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영랑이 그토록 기다리던 태극기가 서울 시내에 다시 펄럭이는 모습을 확인한 후라는 것이다.

전쟁 중 약탈로 유품 한 점 못 건진 유가족

1950년 말, 다시 무서운 추위(영하 13~18도)가 엄습하면서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던 중공군과 인민군은 계속 서울을 향해 공격해 왔다. 1951년 새해가 밝으면서 유엔군과 국군은 1월 4일, 서울에서 다시 후퇴의 길을 택했다.
영랑 유가족들도 걸어서 꽁꽁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피난길에 오르기 전 중요한 책, 의류, 가재도구 등을 지하 방공호에 보관하고 그 위에 흙을 두껍게 덮어 방공호 자체가 안 보이도록 위장한 후 남쪽으로 떠났다.
1년 뒤 다시 서울이 수복되어 유가족들이 서울 집으로 돌아 왔으나 그 집은 옛날 살던 집이 아니었다. 지붕, 벽체, 기둥, 대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마룻바닥까지 다 뜯어 가서 완전 폐가로 변해 있었다.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방공호 위에 덮였던 흙이 말끔히 옆으로 치워진 채 방공호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역시 그 안에는 썰렁한 곰팡이 냄새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유가족은 1930년에 간행된 첫 시집 《영랑시집》 한 권조차 보존하지 못했다.
유가족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집을 재건할 재정적 능력이 전무했다. 전쟁 중이라 부동산 시세가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았지만 생활 방도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헐값으로 집을 정리하고 그 후 20여 년간을 셋방살이로 전전했다.
평생 처음 당한 가난은, 자식들 중 한 사람을 빼놓고는 대학을 6년에서 8년 걸려 마치거나 그도 못해 중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시기였다. 전쟁 후 많은 국민들이 그랬듯이 영랑 유족들에게도 이때가 전무후무한 가장 어려웠던 세월로 기억된다. <735/201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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