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동 칼럼> 그 때 우린 울 시간도 없었다.

<김원동 칼럼> 그 때 우린 울 시간도 없었다.

어느 장의(葬儀)업체에서 일하는 한국분이 필자를 찾아왔다. “망향(望鄕)동산”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전용 가족 묘지를 회사에서 별도로 만들었다며 곧 분양 할 계획이라 한다.
그래서 “망향동산”이라는 돌로 된 큰 표지판 뒤편에 새겨 붙일 4행 시(詩) 정도의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못다 부른 망향의 노래와 못다 한 말들을 이제 가슴에 함께 파묻고 피곤한 여정을 마무리하는 망향동산에서 영면(永眠)하시라는 구절을 넣어 읊어달라는 투다.
시인들이 꽤나 많은 동래인데 하고 고사했으나 집요하게 부탁을 하기에 그러마 하고 몇 일을 지냈다. 그런데 비석공장에서 독촉한다며 이틀에 말미를 줄 테니 꼭 써 달라기에 그러기로 하고 컴퓨터 스위치를 켰다.
이날 따라 한국에서는 천안함에서 희생된 장병들의 영결식이 진행되면서 전국이 온통 울음바다다. 그냥 슬퍼서 운다. 무엇이 두려운지 보복을 위한 눈에 핏발이 선 울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땅에 정착하며 참았던 우리들의 눈물이나 울음과는 달랐다. 얼마나 사무치게 울 일이 많았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울보가 아니었다. 그래서인가 처음 손대보는 4행시(詩)의 시상(詩想)이 떠오르는데도 속도가 붙었다. 좀 울 일이 많았던 사연들로 점철된 이민살이였던가!. 그래서 묘지명에 “망향”이라는 이름도 붙였을 법하다.
우린 울지 않았다. 황무지 같은 낯선 땅에 망망대해의 일엽편주(一葉片舟) 같았던 외로움이 뼈에 사무쳤던 세월을 해쳐온 우리들이다.
언어의 높은 장벽과 이중문화권에 갈등하면서도 정착을 위한 현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난제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울 시간 마저 없었고 더러는 일부러 눈물을 아꼈을지 모른다.
별이 총총한 살을 에이는 듯한 새벽길에 일터로 나가기 위해 텅빈 버스정류장에서 한파에 옷깃을 여미며 기다렸던 무수한 날들, 그리고 공장 블랙타임에 맞춰 나타나는 커피트럭에 줄 선 외국인 동료들을 애써 외면하며 냉수로 얼음장같은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감추었던 눈물, 영어 한마디 못하는 일곱 살짜리 아들을 백인 아동 일색인 교실에 강제로 떠밀어 넣던 날 싫다며 울며 몸부림치는 그를 뒤돌아보지도 않고 내달렸던 길에서도 고여 오는 눈물을 얼른 닦아야했다.
흘러야 할 눈물이 너무나 많았기에 애써 아끼고 감추어야 했던 이 땅에 발을 디뎠던 37년전의 그 날을 생각하며 나는 처녀작인 시비(詩碑)를 한 줄 두 줄 이어 나갔다.
그리고는 망향가를 자장가 삼아 달려왔던 이민 살이에 메마른 아픔을 걷어내며 피곤했던 여정(旅程)을 마감하는 안식처의 안내판인 4행시 글귀 몇 편을 드디어 마무리하고 부탁한 분에게 선택해서 쓰라며 메일로 넣어주었더니 감사하다며 최종작업 직전에 비석공장 과 교정을 확인하는 사인을 하면 일정액의 고료(稿料)를 지불한다는 친절을 베푼다.
다시 TV화면에는 흰 국화송이를 든 채 줄 이은 조문행렬이 방방곡곡에서 치루어지고 있는 울보들의 행진을 본다. 울 시간이 어찌 그리 많은가. 진정 죽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려면 보복을 외치는 시가행렬이 줄을 이어야 할 시간이건만 그렇지 않다.
유독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면 고인이 된 어느 해군의 할머니가 정당대표석에 앉아있는 민노당 대표인 강기갑을 찾아가 “당신들의 북한을 퍼주자는 댓가가 내 손주의 목숨을 앗아갔다”며 땅을 치며 주저앉는다. 50만 조객과 유족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압권이다. 우리에겐 울 시간이 없었다는 걸 눈물을 아꼈다는 걸 강조해본 글 위에 유독 오버랩 되어오는 할머니의 울음이고 항변이기에 그렇다. (kwd70@hotmail.com) <734/201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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