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8>

▲동아일보에서 3월말 발간한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의 표지. <가격 9,000원>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8>

자작 시 낭송 때는 너무도 수줍었던 사람

▲필자 김현철
▲필자 김현철

1949년 초가을, 영랑의 나이 47세 때, 한국 시문학 사상 가장 성대했던 자작시 낭송대회가 서울 명동의 문예 빌딩(모윤숙 시인 소유)에서 열렸다. 수십 명의 유명 중견 시인들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시인들은 저마다 자작시 한 편씩을 멋있게 읊었다.
이날의 프로그램에 따라 영랑의 차례가 오자 동료 후배 시인들은 ‘찬란한 슬픔’이라는 전례 없는 이중 모순적인 새 시어를 만들어서 인생의 생과 멸에서 오는 슬픔을 초극해 보자는 인생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읊을 영랑에 많은 기대와 관심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멋있게 흘러나오리라고 잔뜩 기대했던 참석자들은 영랑의 시낭송을 듣고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참석자들이 여기저기서 소곤대느라 장내가 웅성거렸다. 그 멋있는 시를, 감정은커녕 중학생이 남의 시를 처음 대하듯이 더듬거리며 읽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랑은 낭송을 다 마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단에서 내려와 시인들이 자리한 좌석 사이 통로를 통해 뒤쪽 자기 자리로 걷기 시작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당시 31세의 청년 시인 황금찬(현 92세)은 영랑이 앞으로 지나가자 “선생님, 그 멋있는 시를 어떻게 그리 읊으십니까?” 하고 핀잔 섞인 질문을 던졌다.
이에 영랑은 수줍은 표정을 짓더니 “글쎄, 내 시를 어떻게……나이가 들어가면서 잘 안 되네.” 하며 변명을 했다.
이어서 뒤쪽으로 가는데 또 청년 시인 박목월(1916~1978)도 한마디 던졌다.
“아이고 참, 선생님도. 아니 그 멋진 시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랑은 “이 사람아, 무(無)멋이 멋이야. 그런데 내 시를 어떻게……겸연쩍어서 원…….” 하며 낯을 붉히더라 며 훗날 박목월 시인이 웃으면서 유가족에게 전해주었다.
육중한 외모와는 달리 영랑의 내심은 이렇게 수줍음이 많았다. 황금찬 시인은 영랑시인과 대화를 나누었던 유일한 생존 시인이다. 6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때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기억이 새롭다고 했다.
이 낭송대회가 끝난 후 청년 시인들과 차를 한 잔씩 나누면서 영랑은 “멋있는 시인이 돼야 한다.”고 후배들을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황금찬 시인은 영랑 선생이야말로 아주 멋있는 시인이었다고 옛날을 회고했다.
황금찬 시인은 자신과 가까이 지냈던 박두진 시인 같은 중진 문우들과 어울릴 때는 이구동성으로 “한국 시단에서 영랑을 능가할 시인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만일 아니라고 하는 자가 있으면 공개 토론을 해 보자.”할 만큼 영랑의 적극적인 팬 중 한 사람이도 하다.
이숭원 교수(서울여대)는 훗날 ‘영랑 계보’를 강의하면서 영랑의 직계시인으로 서정주와 박목월을 든 바 있다.

고급 공무원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공보비서관이 바로 영랑의 친구인 시인 김광섭이었다. 이분은 영랑을 만날 때마다 인재난을 한탄하면서 정부에 들어와 새 나라 건설에 힘을 모아줄 수 없겠느냐고 여러 차례 권유했다. 그가 제안한 자리가 공보처 차장과 출판국장이었다.
실제로 일제가 35년 동안 한반도를 강점한 탓에 새 정부가 들어서서 고위직 공무원 직을 채울 인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 간 친구의 권유를 고민한 끝에 영랑은 “내 나라라면 어떤 직책인들 봉사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느냐.”며 당시 막역한 친구였던 모씨에게 그가 바라던 공보처 차장 직을 양보하고 자신은 출판국장 직을 맡기로 결심했다.
끈질긴 항일 자세 때문에 일본 정부의 미움을 사서 평생 제대로 된 직장 한 번 갖지 못했던 영랑은 죽음(1950)을 바로 앞 둔 1949년 가을에 첫 직장을 갖게 되었다.

대중가요는 한 곡도 못 불러

▲영랑 생가 사랑채에서 국악연습 중 기념 촬영한 국악동호인들(1927년)

▲영랑 생가 사랑채에서 국악연습 중 기념 촬영한 국악동호인들(1927년)

영랑의 중앙청 출판국장 취임을 축하하는 야유회가 당시 유원지였던 뚝섬 광나루에서 열렸다. 지금은 서울의 복판이 됐지만 당시에는 자연 그대로의 강과 널따란 모래밭이었다. 전 직원이 수영과 게임으로 야유회를 즐기는데 한국 사람들이 모이면 노래하기 마련, 이 자리에서도 부하 직원들부터 노래(유행가, 대중가요)가 시작되었다.
한동안 시간이 흘러 과장급 부하 직원이 영랑에게 “국장님 노래 한 번 듣는 게 전 직원들의 소원”이라며 노래 한 곡을 청했다.
영랑은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예상했던 대중가요가 아니라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야…’가 흘러나왔다. 주로 사대부나 선비들이 즐겨 부르던 점잖은 평시조였다.
그 순간 즐거웠던 분위기는 찬 물을 끼얹은 듯 사라지고 대중가요를 들을 때와는 판이한 엄숙하고도 무거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직원들은 한 사람도 움직이지 않고 이 ‘지루한’ 시조가 끝나길 기다렸다.
대중가요로 모두가 즐기는데 갑자기 가곡이 나오면 분위기가 확 바뀐다고들 하는데 가곡보다도 더 무거운 시조였으니 이런 경우를 “판을 깼다”고 해도 과한 표현은 아니리라.
영랑은 평소에 살아 온 세계가 그러했고 대중가요로 남과 어울려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러한 어울리는 분위기까지 헤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영랑이 평소 심취했던 음악은 서양 고전과 국악이 전부였고, 그 많은 레코드판 중 대중가요는 한 장도 없었다. 그 흔한 ‘타향살이’니 ‘목포의 눈물’이니, 심지어 가곡 ‘봉선화’조차 몰랐던 영랑이었다.
부하 직원들은 이날 신임 국장님과 야유회에서 게임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서로의 거리를 좁히고 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길 희망했으리라. 그러나 국장님의 시조가 나오면서 애당초 부하 직원들이 가졌던 희망은, 함부로 가까이 대할 수 없는 대상으로 바뀌었고, 그 후 직원들이 국장을 대하는 자세는 엄숙한 것이 되고 말았다.

직원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던 유일무이한 한복 공무원

영랑이 이승만 정부에서 근무할 때였다. 당시 셋째(경복중)와 넷째(서울중) 아들은 중앙청 가까이 있는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아버지의 퇴근 시간과 비슷할 때면 중앙청에 들러서 아버지 영랑의 전용차로 함께 집에 돌아가곤 했다. 학교에서 집이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중앙청 안에서 이 중학생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 영랑의 복장은 다른 공무원들과는 딴판이었다. 다른 분들은 100퍼센트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데 유독 영랑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외출용 한복을 입었다. 안에는 흰 바지저고리, 겉은 언제나 흰 동정에 검은색 두루마기였다.
당시 중앙청은 친일파 숙청을 못 한 채 옛 일본총독부의 친일 공무원들을 99퍼센트 재임용했다. 그래서 이들은 항일 경력으로 형무소에 다녀온 데다 민족시인, 그리고 그에 알맞음직한 한복 차림만을 고집해 온 영랑을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다.
영랑의 한복을 이삼일에 한 번씩 빨고 말리고 다리미질을 해야 했던 안귀련 부인은 자식들 뒷바라지에 남편 수발까지 한가할 날이 없었다. <733/2010-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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