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7>

▲동아일보에서 3월말 발간한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의 표지. <가격 9,000원>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7>
민심 파악에 서툴러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

일제 치하에서 민족 저항시와 서정시로 울분을 달래 오던 영랑은 광복이 되자 새 조국 재건사업에 일익을 담당하길 열망했다. 자신의 애국열을 불태우려면 중앙 정치 무대에 서야 한다고 느낀 영랑은, 1948년 5월 초대 제헌(헌법을 제정하는) 국회의원 후보로 나갔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서울의 친척이, 당시에는 아주 드물게 자가용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차를 내려 보내 선거운동에 활용하도록 했다. 유권자의 8할을 차지하는 농민들을 대변해야 할 국회의원 후보가 자가용차를 타는 등 초호화판으로 놀다니!
평소 영랑을 좋아했던 농민들도 순회 강연장에 차를 타고 나타나는 영랑을 보고 반발심이 생겼다. 결국 후보자 4명 중 3등, 가장 인기를 못 끈 후보 중 하나였다.
또 하나, 영랑이 낙선의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던 큰 이유는 선거 전략의 패배였다. 경쟁 후보의 장남이 장래가 촉망되던 보성전문 재학생이었는데 부친의 선거 운동을 돕고자 웅변에 능한 학우들을 8명이나 동원해서 강진군 내 각 면에 배치했다.
이들이 ‘영랑 낙선’을 목표로 연일 농민들에게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부자를 당선시켜서는 안 된다.”며 순회강연을 계속했으니 혼자 강연을 하던 영랑이 이를 무슨 수로 당하겠는가.
1년 후인 1949년, 강진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모 씨가 국회의사당(당시 중앙청, 지금은 헐리고 없는 옛 일본 총독부 청사 안에 의사당이 있었음) 한 건물 안의 중앙청에 근무 중인 고향 후배인 영랑을 만났다. 그때 그는 영랑에게 “이제 와서 하는 말이네만 강진에서 당선돼야 할 사람은 자네가 아니던가!”라고 했다고 한다.

자식들에게는 문학을 전공하지 말라고…
장녀가 이화여전(현 이대) 가정학과를 택했을 때 아버지 영랑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 후 장남이 대학에 진학할 때 국문학을 선택하자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무조건 반대했다. 이어 자식들에게 대학 진학 때 무슨 과를 택하든 반대하지 않겠지만 문학만은 피하라고 했다.
영랑 자신은 넉넉한 유산 덕분에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다 하고 살아왔지만 자식들은 이제 유산도 얼마 남지 않은 터에 자활의 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피를 속일 수는 없었던지 자식들은 하나 같이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자 영랑은 한 발짝 물러서서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문학을 전업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영랑은 얼마 후 자식들에게 문학 전공을 반대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문학을 생활 수단으로 삼고 있는 이른바 전업 문인들 중, 생활비를 제대로 벌어들이는 분들은 전체 문인 중 1%가 채 안 된다. 그것을 알면서 자식들에게 문학을 전업으로 삼으라고 권할 부모가 있겠느냐?” 이 말을 하며 영랑은 씁쓰레 웃었다.
그 자리에서 영랑은 문학 작품으로 제법 수입을 올리는 두어 명과 생활비를 근근이 충당하고 있는 문인들 몇 명을 손꼽았지만 그나마도 소설가만 있을 뿐 시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영랑은 비록 문학을 전공하더라도 문학 활동은 부업으로 삼고 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가르치는 직업이나 다른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문인들 중 수입이 있는 분들은 거의가 학교나 신문, 잡지, 방송 등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랑은 시문학을 전공한 데다 항일 경력 때문에 광복의 그날까지 이렇다 할 직장을 갖지 못했다. 정확히 말해 생후 첫 직장이 생긴 47세(48세에 별세)가 될 때까지 수입이 없이 지냈으니 생활이 안 되는 문학을 전공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겠는가!
60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도 문학 또는 다른 분야의 예술을 전업으로 삼아 여유롭게 생활하고 있는 예술인들의 수는 극소수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테러 위협에, 자식들 교육 위해 고향 떠나 서울로 

▲눈이 녹지 않은 경복궁 경회루 연못가에서 시상에 잠긴 공보처 출판국장 시절의 영랑(1949년 겨울)

▲눈이 녹지 않은 경복궁 경회루 연못가에서 시상에 잠긴 공보처 출판국장 시절의 영랑(1949년 겨울)

전 국민이 손꼽아 기다리던 조국 해방의 날이 밝자 강진에도 군민 안전과 조국 새 정부 촉진을 목적으로 한 ‘대한청년단’과 ‘대한독립촉성회’ 그리고 새 정부의 경찰이 파견될 때까지 치안을 유지할 ‘치안대’ 등 단체들의 지부가 결성되면서 영랑은 청년단장, 촉성회의 선전부장 그리고 치안대 고문직을 맡게 된다.
당시 전국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로 강진 지역도 좌익계의 활동이 활발해서 우익 인사들을 기습, 살해하는 사건 등이 빈번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진읍 목리 출신의 차형환 청년단 간부(1917~1968, 영랑에 이어 2대 청년단장 역임) 등 청년들이 단장인 영랑을 경호하던 중 생가의 안채와 사랑채 뒤 대밭에서 누군가가 일부러 갖다 놓은 방화용으로 의심되는 물품을 발견하고 이를 경찰에 신고해서 그것이 방화용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경찰은 방화사건을 예방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24시간 청년단원들을 집 주변에 배치해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경찰은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충고했다.
청년단원을 24시간 집 주변에 배치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처지였다. 결국 영랑은 신변 안전에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평생 무직자로 유산만으로 살아와 가세가 거의 바닥이 난 마당에 장남, 차남이 서울에서 유학 중인 데다 3남까지 서울의 학교로 입학하게 되니 세 아들의 하숙비 감당 또한 고민거리였다.
일제 강점기 때도 그랬지만, 해방 직후부터는 부쩍 서울에 있는 문인들이 영랑에게”해방도 되었는데 시골에서 무얼 하나? 이제 그만 서울로 올라와 새 나라 건설에 힘을 모으게나.” 하면서 상경을 부추겼으나 그때마다 못 들은 척 했던, 그토록 떠나기 싫었던 사랑하는 고향을, 이제는 떠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몰린 것이다. 영랑은 며칠을 두고 잠을 설치더니 끝내 서울로 이주를 결심했다.
그러고서 불과 한 달, 서울에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 남지 않았던 전답 등 전 재산을 헐값에 정리하고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난 것이 1948년 여름이었으니 셋째가 중학교에 입학(당시는 9월 1일)하기 직전인 여름날이었다.
영랑이 얼마나 고향을 사랑했는지 그의 수필 ‘감나무에 단풍 드는 전남의 9월’ 일부를 인용해 보자.

“……감이 단풍들어 붉었구려……동백이 십자로 쫙 벌어지면 까만 알맹이 동백이 토르륵하고 빠져 쏟아지는데 풀 위에 꿈을 맺는 이슬 같이 구르지요……그 알이 어쩌면 그렇게 고담(속되지 않고 아취가 있는. 편집자 주)한가!……달빛이 희고 천지의 오묘하고 신비함이 이 밤 그 나무 그늘 밑에 있는 듯 싶습니다……은행이 17년 만에 세알 열리고……천관산 – 흰 수건 쓴 호랑이 돌아다니시고 그 산 밑에 청자기 굽던 자리가 있습니다.”

이 글이 발표된 해가 1938년.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러 1968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현재 청자 박물관 자리)에서 고려 때(12세기)의 청자가 발굴되어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으니 영랑은 이미 이 자리가 청자 도요지였음을 고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1960년대에 유가족을 찾았던 영랑의 친우 이헌구(문학평론가)는 “영랑이 가끔 고향을 말할 때면, 옛날엔 도자기뿐 아니라 기와까지 구어서 지붕을 청자기와로 단장하고 살던 곳이라고 자랑했다.”면서 “그때까지는 강진이 옛날에 그렇게 멋진 곳인 줄을 몰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음호에 계속> 732/201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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