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몰래 다가온 두려운 존재

코로나, 몰래 다가온 두려운 존재

열심히 살았습니다. 삶의 순간들이 힘들때도 고통스러울때도 있었지만 지나고 나면 감사함으로 남았습니다. 그래도 이만큼 살았다는 그 사실이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해야 했습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이 세상 그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고 살아오면서 받은 모든 것들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60이 넘은 이 나이에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이 너무 고마워 열심히 일했습니다. 더 잘하고 싶었습니다. 주말에는 무슨 일이라도 찾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감사하고 기쁘게 살아감이 제가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해 코로나가 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 할 때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래도 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는 저는 별다른 생각 없이 매일 출근을 하며 가족들과 주위에 있는 이웃들을 걱정을 하며 그분들을 위해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만을 했죠. 매일매일 코로나 소식을 들으며 언제나 이 어려운 상황이 지나갈까 하는 마음으로 아픈 마음을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2020년 12월 중순쯤 어느날 갑자기 몸이 많이 피곤해 혹시나 몸살감기인가 하고 오랜만에 주말을 집에서 쉬기로 마음을 먹었죠. 힘이 없고 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먹순이가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것이 없더군요. 하루 종일 잤습니다. 그 다음날도 감기약을 먹고 하루 종일 잠을 잤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밥때를 놓치지 않고 어디를 가도 항상 잘 먹는다는 소문덕분에 푸짐한 음식을 대접받던 제가 밥 먹는 일이 그렇게 힘든일

인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월요일 출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을 하고 며칠 쉬면 괜찮을 거라고 안심을 시키고 푸욱 쉬면 좋아질거라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죠. 수요일이 되서는 점점 안 좋아져 더욱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워졌고 아이들은 강제로 저를 응급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코로나 양성 반응, 아이들도 가족도 그리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믿을 수가 없는지 모두 놀라 할 말을 잊은듯했죠. 급하게 폐 사진을 찍고 의사들이 몰려오고 간호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건강을 자부했고 교만했던 저는 갑자기 산소 호흡기를 코에 끼고 응급 주사를 맞으며 여러 종류의 약을 투약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죠. 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간호원과 의사에게 맡겨야 했습니다. 가까이 올수 없지만 매일 아침 직장 동료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힘이 되고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순간에 늘 울컥하며 눈물이 나더군요. 그 상태에서 밥을 먹는 것도 그 쉬운 화장실 가는 것 조차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힘들고 정말 이렇게 허무하게 내가 무너지는듯해 가슴이 아팠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 상황이 또 너무 무서웠습니다.

입원 3일째, 이제 산소호흡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약물치료는 계속 되었습니다. 스테로이드, 비타민 D, 항생제, 3가지 천식 치료제, 그리고 스테로이드 치료를 받으며 당이 너무 올라 당뇨병을 합병증으로 얻을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두려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래서 당을 내리는 약까지 추가가 되었죠. 여러가지 약을 며칠 동안 수없이 먹고 링거로 맞았습니다. 평생 안 먹은 약을 며칠만에 다 먹은 듯 했죠. 뉴스에서는 매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려 죽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나이에 상관없이 기저 질환이 없던 사람들도 갑자기 세상을 뜨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죠. 나도 그중에 한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간호원에게 제 전화기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메모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전화에 입력을 했습니다. 만약의 상황에 연락해야 할 곳, 전화해서 문의해야 할 곳, 찾아야 할 문서, 아이디와 패스워드, 아이들이 알아야할 모든 것을 정리했습니다.

입원 4일째, 모든 치료가 다 되었으니 퇴원을 해서 집에서 편안하게 쉬는 일만 남았다고 하더군요. 물론 산소 호흡기를 포함해서 퇴원 절차를 밟았습니다. 아직 퇴원을 하면 안될 것 같은 불안함은 있었지만 정말 얼른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일주일째 걱정을 하며 울기만 했던 딸에게 연락해서 퇴원을 했습니다. 아직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도 집은 참 편안하고 좋은 곳임을 느꼈습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딸들의 모습을 보며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앞을 가리더군요. 이제 음식은 모두 건강식으로 바뀌었고 당을 올릴 수 있는 음식은 모두 제한이 되었고 쌀밥은 생각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침대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딸에게 의존하며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것이 믿어지지가 않고 견디기 힘들었죠. 퇴원후 첫주는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 딸을 보며 내가 더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몰래 혼자 숨쉬기 운동, 움직이기 운동 그리고 천천히 걷기, 방안에서의 조용한 움직임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약 때문인지 입안이 다 헐어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입술은 거의 세배로 부어있고 온몸은 알러지 현상이 나타나는지 간지럽고 눈은 항상 희미하게 잘 보이지도 않고 몸은 늘 늘어져 있는 상태에서 하루종일 그냥 누워만 있다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또 한주가 지나갔습니다.

딸에게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더 달라고 졸랐습니다. 김치가 먹고 싶고 깍두기 좀 달라고 하니 물에 씻어 보리죽에 주더군요. 그렇게 먹고 났는데 당이 200이 넘어 또 걱정을 하게 만들었죠. 하지만 힘을 축적시켜야 더 빨리 회복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이 오르니 안된다고 음식을 조절해서 주는 딸은 안타까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지만 이 지독한 병을 이기는 방법은 바로 내가 정신을 차리고 용감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자주 일어나 걷고 숨쉬기 운동 하고 잘 먹으려 노력중입니다. 무엇이든 잘 먹고 힘을 내어 일어나려 합니다. 얼른 털고 일어나 다시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3주째 되는날, 스테로이드 치료가 끝났습니다. 그래도 당이 오를까봐 음식은 여전히 조절하고 있습니다. 아직 산소치료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저는 느꼈습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또 건강에 상관없이 이 병은 누구에게나 치명적일 수 있고 두렵고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나와는 무관한 듯이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코로나에 걸려 저는 엄청난 두려움가운데 코로나를 경험했습니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저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이 바이러스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 주위에 코로나로 고생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벌써 5달째 출근을 못하는 이분은 뇌를 공격을 받아 기억력이 상실되고 아직 50대 인데 초기 치매가 왔답니다. 몸에 모든 장기가 이상이 있다는 분도 계시고 장기 후유증으로 몇달째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저도 벌써 한달을 아무것도 못하고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살아있습니다. 주위의 큰 사랑이 저를 붙들고 놓지 않았습니다. 저를 사랑해주시는 모든분들의 간절한 기도와 딸들의 정성이 저를 지금까지 지켜주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마음에 아픔을 묻어야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의 기도와 마음의 평안을 얻도록 하나님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다름호에 계속>    이승애 번역기자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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