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 칼럼> 봄의 품속에 안긴 3월

<김명열 칼럼> 봄의 품속에 안긴 3월

 

나는 지난 2월중순부터 하순까지 개인적인 용무로 북쪽지방을 여행하고 다녀왔다. 내가 사는 플로리다와는 달리 그곳은 아직도 혹독한 추위속의 겨울이 머물러있었고, 언제 밤늦게 주인 몰래 집의 담을 타고 넘어올지 모르는 도둑놈처럼 예고 없이 그렇게 추위와 바람과 눈은 소리 소문도 없이 쳐들어왔다. 추위에는 방어력이 무디어진, 따듯한 플로리다 지방의 더위속에 습관화된 나의 체질이라 그런지 오랫만에 맞딱 뜨린 겨울의 추위와 설한풍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움추러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계절의 순환적 수레바퀴는 역풍으로 되돌려 돌리지 못하듯이, 이제는 봄의 첫 소식을 알려주는 3월이 우리 곁에 찾아왔고 햇살은 한결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스함을 동반하고 있다.

코끝으로 스쳐가는 바람에 봄내음이 스며있고 등에 비춰오는 햇살의 감촉이 더욱 따스하다. 해도 점점 길어져서 이른 아침인데도 이웃집 지붕위의 아침 해가 눈부시게 밝다. 이곳 지구의 북반구, 북쪽지방의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 겨울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 곁에 훈풍을 동반하고 찾아온 이른 봄은, 과거시험을 보고 돌아오는 서방님을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이하는 새색시처럼 반가움이 앞선다. 어느새 앙상한 가지의 나목들이 움을 틔워내고 새싹의 고사리 손을 내민다. 저런 것을 보면서 과연 사람이 자연을 대할 때의 마음은 겸허해질 수밖에 없나보다. 농작물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밤에 잠을 자는 사이에 어느새 싹이 솟고 줄기가 자란다. 사람이 잠시 씨뿌리고 거름 주며 돕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생명을 만들고 자라게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이다지도 거대하고 놀라운 계절속에 내가 존재하며 속해있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영광스러운 마음뿐이다.

까마득한 옛날 코흘리개 어렸을 때의 1년이라는 시간은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도 길게 보였는데 언제부터인가 계절은 팽이처럼 어지럽도록 빨리 돌아간다. 내 머릿속에는 지난봄날 나뭇가지에서 싹을 틔우던 연두빛 잎새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제 그 똑같은 가지에 다시 새로운 잎이 돋아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인생은 한번의 날숨과 함께 나오는 하얀 입김과 같다고 했던가. 아침에 피었다가 점심에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버리고 마는 풀과 같다고 했다. 항시 따듯한 계절, 상록수가 초록색으로 파도를 이루는 플로리다 지방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여기서는 보고 느끼게 된다. 인생 후반기에 뒤늦게나마 이런 것을 깨닫게 되니 이것이 과연 다행인지 불행인지를 모르겠다. 하늘과 땅에 숨어있으면서 모든 것을 치유하는 이 신비한 생명력이, 설사 내가 사라지더라도 계속 남아 활동할것이라 생각하니 어쩌면 그 힘에 힘입어 내 생명도 이 세상에서가 아니면 저세상에서라도 어떻게든 치유되어서 연장되고야 말것 아닌가 하는 희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욕망이라면 욕망일것이다.

사실 길러진 욕망(돈을 벌고 싶다. 예뻐지고 싶다 등등) 이외에 타고난 욕망들은 모두가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욕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먹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은 음식이 있기 때문이고, 성적으로 갈증을 느낀다는 것은 섹스가 있기 때문이다.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갈망한다는 것은 또 실제로 그런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눈물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삶을 갈망한다는 것은 아마도 영원한 생명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의 신자로서 나는 굳건히 그렇게 믿고 있다. 지금 우리의 존재방식에서 우리가 굳이 물질적인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개체로 혹은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어쩌면 단지 스쳐가는 과정이 아니라 무슨 영원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힌두교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마치 물방울이 바다에 떨어져 흡수되듯이 거대한 자연이나 우주에 흡수된다고 한다. 몸도 사라지고 자아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몸이나 자아의식은 마치 환상이나 꿈처럼 가짜이거나 한계속에 존재하며 잠시 머물러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머물수록 낭비이다. 그런데 자연에 무슨 낭비라는 것이 있겠는가. 내가 지니고 있는 몸과 개인의식은 소중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소크라테스는 말년에 억울한 죽음을 맞아서도 평온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남이 자기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이다. 몸이라는 것은 참이 아니고 영혼이야말로 참 자아이기 때문에, 자기 영혼이 해를 입는 것은 스스로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나 부도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악한사람들에게 당하는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 숭고하고 존경스러운 태도라고 할 만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뭔가 현실적인 것 같지가 않다. 몸이 느끼는 고통을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나 같은 범부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생동감과 생명력이 느껴지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벌써 생명의 손상을 걱정스러워 하다니 너무 촌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햇살이 가득한 오늘, 그저 하루 먹을 것이 있고, 당장 입을 옷이 있으며, 오늘밤 잠잘 곳이 있으니, 이렇게 의식주 편안히 가족과 함께 고통받지 않고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하며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를 드린다.

꿈과 희망과 꽃소식을 함께 담은 이 아름다운 봄에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봄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선물해주신 자연의 선물이다.

그동안 겨울철 추위에 닫아걸었던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맨땅에 돋아나는 새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받아들이자. 그리고 나의 이웃이나 불쌍한 이들에게 온정의 마음을 전하자. 지금의세상은 너무나 인정이 메마르고 냉정한 사회다. 따듯한 봄은 해마다 찾아오지만 인간들의 마음은 언제나 차거운 겨울이다. 약자에 대한 배려의 아량은 없어지고 이기주의만 횡행하고 있다. 사회의 지도층일수록 자기 몫 챙기기에 급급하고 폭력과 무질서와 악법이 난무한다. 이러한 세상이 되고 보니 눈물조차 말라버렸다. 그러나 이 산하에 봄철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변해있었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더욱 삭막하고 강파르게 바뀌었을 것이다. 훨씬 우울하고도 심란한 분위기속에 빠져 있을 것이 틀림없다. 해마다 돌아가며 봄철을 맞이하기 때문에 그 기쁨과 즐거움을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봄은 자연이 인간에게 허락한 섭리이며 축복이다. 헐벗은 가슴을 펴고 땅속깊이 솟아나는 대지의 기운을 흠뻑 들이마시자. 누구에게나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될 이 봄철, 아름다운 봄이 시작되는 꿈과 희망의 3월이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57>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