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렬 유럽여행 기행문 / 16회> 세계2차대전의 전범, 아돌프 히틀러 이야기

<김명렬 유럽여행 기행문 / 16회> 세계2차대전의 전범, 아돌프 히틀러 이야기

 

아돌프 히틀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고충을 겪고 있다. 학교는 중퇴했고, 변변한 직장에도 취직을 하지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했다.

독일 괴들리츠에 사는 아돌프 히틀러(66)는 이름 때문에 겪었던 일들을 풀어놓았다. 그의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놀라거나 웃는다. 집앞의 문패에는 가명을 적어놓았다. 그는 누군가 장난을 못치게 가명을 쓴다고 답했다.

일본 언론매체 아시히신문은 얼마전 히틀러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싣고 그들의 고충을 전했다. 전후에는 히틀러와 혈연관계가 전혀 없던 사람도 편견이 두려워 개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내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름을 바꿔야하는지 이해하지 못 하겠다” 고 말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가 죽은 다음에는 그의 무덤 묘지에 아돌프 히틀러라는 이름을 새기진 않을 것이라며 “네오 나치에 악용되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히틀러 성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개명을 했다. 독일인들은 ‘아돌프’라는 이름도 여전히 기피하고 있다. 전후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일인들에게 아돌프 히틀러라는 이름은 아직까지도 기피의 대상이며 그 이름은 상처로 남아있다.

미국 뉴저지에 사는 어느 젊은 부부의 이야기이다. 평소에 그들은 독일의 나치와 아돌프 히틀러를 좋아하는 극우주의자이자 히틀러 신봉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의 이름도 아돌프 히틀러라고 지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가 한 살이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들의 생일 케익을 사기위해 제과점에 들른 이들 부부는 생일 케이크 위에 “해피 버스데이 아돌프 히틀러”라고 써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제과점측에서는 일언지하에 No였다. 세계 제2차 대전의 전범이자 살인마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없다고 거절을 당한 것이다. 이후 이러한 현상은 몇군데의 케이크 점을 방문하면서도 똑같은 거절을 당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일반 제과점에서 평범한 케이크를 사다가 아기의 첫 돌잔치 케이크를 자를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몇년이 지나고 이들 부부가 아이를 유치원에 입학시키기 위해 유치원을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역시 그 아이의 이름이 다른 사람들이나 아이들에게 경멸감이나 혐오감을 줄 수 있다고 하여 입학을 거절당했다. 아돌프 히틀러란 이름을 가짐으로 직접적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면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고 싫어하는 세계 제2차 대전의 전범이자 세기의 흉악범이자 살인마인 아돌프 히틀러에 대하여 그의 인생 여정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의 인생 역사는 굴곡이 많았었고, 그의 인생을 전부 나열하여 소개한다는 것은 지면관계상 힘든 일이라서 생략하며, 여기서는 그의 20대 이후의 과정을 짧게 소개하여드리도록 하겠다.

아돌프 히틀러(1889년 4월20일~1945년 4월30일)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지도자이자 정치인이다. 히틀러는 뛰어난 웅변술과 감각의 소유자였으며 이후 독일 민족생존권 수립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과 오스트리아 병합, 체코슬라바키아 점령, 폴란드 침공 등을 단행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전쟁 중 그의 유일한 말살정책으로 수많은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또한 히틀러는 상당수의 폴란드 사람들에게까지도 유태인이라 모함하여 유태인과 마찬가지로 가스실에서 같이 학살시켰다.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는 집시와 장애인도 있었다.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고, 히틀러는 1945년 4월29일 소련군에 포위된 베를린에서 자신의 연인이었던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뒤 이튿날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 벙커에서 시안화칼륨을 삼키고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

히틀러의 일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그는 급부상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뮌헨 오데온 광장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장교앞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는 히틀러가 우연히 촬영되었다. 히틀러는 즉시 바이에른 16보병연대 입대를 지원했다. 그에게 진정한 마음의 조국인 독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병이었던 히틀러는 1918년 10월13일 독가스 공격에 시력을 잃게 되고, 야전병원으로 후송된 후 시력이 회복되자 독일 육군에 입대하여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뮌헨의 제4군 사령부로 복귀해 활발히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1919년 9월 전후의 혼란속에서 싹트고 있던 수많은 민족주의 운동중 하나를 조사하라는 군 정보 작전참모부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히틀러는 오히려 노동당에 입당하여 당원증 제55번을 받았다. 히틀러는 곧 당내에서 유능한 연설가가 되었고 지도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20년초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의 로마진군에 자극받은 히틀러는 1923년 11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바이에른주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으며 부상을 당하였다. 그 사건으로 베르세르크 감옥에 투옥되는데, 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을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이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 공화체제를 내부로부터 전복할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살아나던 독일경제는 실직자수가 6백만명으로 늘어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정당들이 속수무책인 가운데 히틀러의 나치당은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그는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단독집권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1932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하여 1340만표(36.8%)까지 득표하였으나 파울 힌덴부르크(원래는 장군) 후보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선거에서 33.1%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했으나,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자본가나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위하여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좌파(공산주의)세력, 반대파를 감금, 납치, 암살, 고문, 불법적인 재판과 처벌 등의 방법으로 탄압하였다. 기존 바이마르공화국의 무능함을 강조하며 인기를 모은뒤 1933년 7월 일당독재 체제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자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되었고 그 지위를 총통 및 총리(약칭 총통)라 칭하였으며 보통 총통으로 불리게 되었다.

세계 제2차대전…. 히틀러는 1939년 9월1일에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는 스탈린이 히틀러와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폴란드를 히틀러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 맺은 군사동맹조약이 있었으나 소련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는 이유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곧 기자들에게 ‘앉은뱅이 전쟁’ 이라고 불리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은 너무나 늦었으며 미국은 국내 여론때문에 고립주의를 천명하며 직접개입을 삼가고 있었다. 공습 및 기계화 부대의 신속한 기동력이 결합한 ‘전격전’ 이라는 새로운 전법으로 독일은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로 부터 항복을 받아냈으며 프랑스마저 항복하였다. 1940년 말까지 히틀러는 서부유럽과 북유럽 전체(중립국인 스웨덴과 포르트칼, 스위스와 스웨덴은 제외)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영국에 우세한 공군을 쏟아 부어 폭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영국에 패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연합군의 마지막 보루인 영국에 공습을 퍼부어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려는 ‘배틀 오브 브리톤’이 실패했음에도 히틀러는 1941년 6월20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고, 10월에는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소련의 매서운 추위와 한파 앞에서는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같은 해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전쟁은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허스키작전에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에 밀린 이탈리아가 영국군에 항복,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항복을 하게 되고 독일군은 천왕성 작전으로 인한 소련군의 반격에 스탈린 그라드에서 소련군에게 패하고 치타델작전의 대표적인 공격으로 대표되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였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독일 본토까지 밀어내고 베를린을 점령함으로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결국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괴멸, 북아프리카 전선의 상실, 암살 미수로 인한 히틀러의 정신이상, 등이 초래한 전선의 혼란, 미국의 참전으로 전열이 더욱 두터워진 연합군의 진공으로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는다. 1945년 4월29일, 독일의 패망에 절망한 히틀러는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렸으며, 다음날인 4월 30일 아내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으로 자실했다. 향년 65세. 이렇게 해서 세기의 살인범, 전범, 악마, 괴수 등의 각종 죄악속의 오명을 갖고 살던 아돌프 히틀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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