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불행하고 절망적일지라도 삶의 가치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각종 원인이나 이유, 주어진 현실속의 환경이나 조건 등등에 의하여 이 지구촌 세계 곳곳에는 오늘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명을 끊고 있다.
계속되는 죽음의 연속, 특히 한국은 매 40분마다 1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고 한다. 하루 36명이 죽음을 택하는데, 이는 2003년 부터 2020년 까지 OECD국가 중 자살률 18년간 1위의 불명예를 갖고 있다고 한다.
김영배씨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것은 지난 1월 29일 오전 11시30분. 도봉산의 후미진 산 계곡에서 어느 등산객에 의해 발견되었다. 서울시 성동구의 어느 동네에 중년 가장으로 살고 있었던 김씨는 지난 1년반 전 자신이 경영하던 치킨집이 가까운 거리에 또 하나의 같은 업종인 치킨 전문업체 체인점이 생겨나는 바람에 경영 악화로 인해 많은 빚을 안고 문을 닫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는 말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산더미같이 불어난 빚을 갚기 위해 살던 집을 처분했으나 역 부족이었다.
그로 인해 변두리의 산동네 허름한 집을 찾아 세를 들어 이사를 갔는데, 자기의 몸에는 병이 생기고 말았다. 자기의 부인은 먼 길을 출퇴근 하며 가정 파출부(도우미)로 일을 했지만 자식들 교육비를 감당하기에도 힘겨웠다. 김씨 자신은 일거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직업을 구했으나, 가뜩이나 경기는 침체되고 경제는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때라, 일할 직장을 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 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이곳저곳, 사방을 일자리를 찾아 다녔으나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다. 이러다 보니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말할 수 없이 머리와 가슴속에 엄습해오는 책임감과 의무감이 자신을 더욱 초라하고 비관스럽게만 만들었다. 어찌보면 무능력한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고 처자식들에게도 짐이 되는 것 같았다. 이럴때 떠 오른 생각이 자살이었다. 이렇게 희망이 없이 좌절과 고통속에 살아갈 바에는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머릿속에는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집을 떠나 어느 화공약품 가게에서 극약을 사서 주머니에 넣고 도봉산에 올라갔다. 그리고 그 약을 마시고 한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주머니 속에는 처자식들에게, 부족한 남편과 아빠를 용서해달라는 내용과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짧은 내용의 유서 한장을 남기고 그는 그렇게 불쌍하게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세상을 살다가 모든 일이 자기의 뜻대로 안되고 좌절과 실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결코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희망은 한끝도 안보이고 앞날이 캄캄하다 하더라도, 즉 아무리 절망적 일지라도 그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생명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거두는 일은 자신의 처지만 생각했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이 받을 고통과 상실감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유족들에게 고스란히 떠넘기는 일이다. 그것은 또 자신의 사회적 구실과 기여를 무시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있다면 그가 메워야 할 자리 대신 빈자리를 사회에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개인 일 뿐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 있다면 그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 가능성을 무(無)로 돌려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나 신의 명령이 아니라 하더라도 삶이 어렵고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목숨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수행해야 할 사회적 구실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며, 우리가 보살펴야 할 사랑하는 이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뿐 아니라 우리가 수행해야 할 구실과, 우리가 해야 하는 일과, 우리가 사랑하고 보살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꿋꿋이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삶에 내재된 수많은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고 삶이 수반한 무수한 호기심도 충족시킬 수 있으며, 삶이 주는 은밀한 기쁨도 누릴 수 있고 삶에서 오는 뿌듯한 보람도 느낄 수 있다.
사람은 단지 살기 위해서 살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살아야 할 의미를 찾고 또 부여하면서 산다. 사람은 나름대로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갖은 고통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아직 살아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삶이 정말로 의미나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찾지 못했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라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그런데 삶에는 불가피하게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따른다. 세상에는 그 누구도 아무런 어려움이나 위험이 없이, 따라서 고통이나 불안이나 긴장없이 살수는 없다. 보기에 따라서는 삶의 어려움과 불안으로 점철되어 있고 긴장과 고통의 연속이다. 인생이란 곤란과 불안이라는 암초가 널려있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암초를 피하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많은 노력과 공을 들여야 한다. 말하자면 삶이란 항시 긴장하고 수고해야 제대로 영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어떤이들은 자포자기 하고 살거나 엉뚱하게 남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희망의 삶,
희망은 우리들 인생에 주어진 가장 소중하고 가장 정의롭고 가장 훌륭한 축복이 다. 희망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산소 같은 필수 요소라는 점에서 소중하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남녀노소와 상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무료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정의롭다 하겠다. 희망이 가장 훌륭한 축복인 이유는 희망은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두려움 없이 헤쳐갈수 있는 용기와 투지를 주고, 희망을 가지면 미래에 대한 설레는 마음과 함께 행복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는 희망을 잃고 좌절을 하거나 절망속에 빠져들 때가 많이 있다. 불안과 좌절과 절망은 항상 서로 붙어 다닌다. 사람은 느림의 여유가 없으면 정신없이 바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불안한 생활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좌절하여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으로 삶을 구분하지만 이 두가지는 실은 하나이므로, 정신적으로 불안한 사람은 물질적인 삶 역시 안락하거나 풍요로울 수 없다. 정신적으로 불안하면 불행할 수밖에 없고 불행하면 좌절과 절망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
남녀노소 누구나 성인이 되기 전에 질풍노도와 같은 불안, 좌절, 절망의 파도를 한 두번쯤은 넘는다. 시대와 지역, 가정 내지 사회적 상황 때문에 일생동안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불안, 좌절, 절망만을 맛보다가 처절한 최후를 맞이하는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행복과 만족이라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곳은 결코 비옥한 땅이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본다면 절망이나 좌절, 불행이라는 돌맹이로 뒤덮인 척박한 황무지 땅 일수도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두번쯤 좌절과 절망에 빠져보지 않고 서 우리가 어찌 진정한 행복의 값어치를 알 수 있겠는가? 절망과 좌절, 불행이라는 것은 우리가 참된 행복을 이루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보고 싶다. 따라서 지금 힘들고 어려우며 절망속의 늪에 빠져있다고 실의에 잠겨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 잠시 불행이나 좌절을 겪고 있다고 해서 내내 한숨만 쉬고 현실을 한탄하며 절망속에 헤맨다는 것은 더욱더 어리석은 일이다.
절망과 좌절, 그리고 불행이라는 것이 설사 내 삶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쇳덩어리나 바윗돌로 짓눌러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 뿐, 시간과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듯이 행복은 찾아오는 법, 그 무겁고 힘들은 짐들을 무사히 들어내기만 한다면 그 밑에는 틀림없이 눈부시고 찬란한 행복 이라는 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을 것이다. 문학 작가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429/2024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