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 금강산 관광때 있었던 이야기들<7>

<김명열> 금강산 관광때 있었던 이야기들<7>

(지난주에 이어서…..)

간부 복장을 한 그들 남녀 두 사람은, 그곳 금강산 관광특구 지역에서 근무하는 북한측 간부급 지도원들 중에서도 무척이나 계급이 높은 사람인 듯 보였다. 그들은 우리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우리 부부가 미국에서 이곳에 구경차 왔다고 하니, 무척이나 신기(?) 해 하고, 어떻게 해서 이곳까지 미국에 계신분이 오셨을까? 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무척이나 궁금하고 그곳 사회의 모습과 생활들이 알고 싶어 보인다. 서로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자 간부 동지는 나의 집사람과 어울려서 대화를 나누고, 남자 지도원 동지는 나와함께 동행하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칫 잘못 이야기를 했다가는 그들에게 잡혀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머리속에 스쳐갔다. 조심조심 말을 아껴가면서 그가 묻는 말에 답변을 해 주고, 나 역시 궁금한것을 조심스럽게 線(선)을 넘지 않으면서 물어보았다.

이것 저것 북한사회의 서민적 생활 이야기와 평범한 시장경제 이야기 등, 책잡히지 않을 사항들을 물어보았다. 그사람 이야기인즉 북한에서도 못 사는 사람은 못 살고, 잘 사는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처럼 부를 누리며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도 자기만 열심히 일한다면 먹고 사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들 두 남녀 간부들은 북한에서는 최고 학부를 나오고 고급 엘리트 그룹에 속하는 사람인데,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바로는 그렇게 사상적으로나 이념적으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깊게 물들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내가 묻기를 “공산주의에서는 공동 생산하고 공동 분배 원칙에 의해 빈부의 격차가 없어야 되는데, 왜 잘사는 사람은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못 사느냐?”고 물으니 그의 대답 “자본주의 사회나 공산주의 사회나 누구나 노력한 만큼의 소득 분배는 그 행한 만큼의 댓가로 보상돼야 한다”며 그러나 계급에 따라 차등의 분배는 있어야 된다고 했다. 즉 간부급(고위 직)과 일반 서민들의 월급이나 분배가 똑같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이곳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물으니, 이곳에 온 모든 사람들(북한측 요원들)은 엄격하고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발되어온 선택된 사람들 이라고 자랑을 한다. 자기 역시 북한의 모 정부 기관에서 근무하다가 이곳에 오면 돈도 더 많이 받고, 특혜도 많아서 이곳에 자원해서 왔다고 했다. 집에는 두달에 한번씩 일주일 휴가를 받아 다녀온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7Day, 즉 쉬지 않고 일주일 내내 근무한다고 했다.

자기 얘기를 진솔(?) 하게 전해준 그는 이어서 나에게 미국 이야기를 물었다.

자유민주주의 미국의 사회와 시장 경제, 정치,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어느 정도 알고있는 듯 했다. 내가 자랑삼아 자유스럽고 평화로운, 개인의 인권이 보장되는 미국 사회 이야기를 이것저것 얘기 주었더니 얼굴에는 놀라는 기색이 확연히 엿 보였고, 풍부한 물자와 넉넉한 식량으로 모든 국민들이 굶주리지 않고 여유롭게, 취미생활과 여행을 즐기며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세계, 또는 국내에서 어디든지 자유롭게 제재를 받지 않고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나의 말에 무척이나 부러운 눈치를 보였다.

폐쇄된 북한에서는 어디를 갈려면 여행허가를 반드시 받아야만 원하는 곳을 갈수 있다고 했다. 자기 같은 간부 역시 여행허가서 없으면 아무 곳도 갈수 없다고 했다.

내가 물었다. “선생님에게 내가 미국에서 초청장을 보내면 오실수 있습니까?” 그랬던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웃기만 했다.

나의 뒤에서 따라오며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집사람과 여성 간부 동지는 무엇인가를 쉬지 않고 얘기하며 오고 있다. 이들의 대화 내용은 나중에 들었지만, 나의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들려드리도록 하겠다.

남자 간부 동지는 나와 대화를 나누며 오는 도중, 따가운 8월 여름의 햇빛이 너무나 눈부셔서 자주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다. 얼굴은 왼통 햇볕에 그슬려 구리 빛으로 변해 있고…… 이때 그가 안쓰러워서 나는 내가 갖고 있던 선 그래스를 벗어서 그에게 건넸다. “이거 내가 이곳에 오느라고 미국에서 새로 새것을 산겁니다. 몇번 안 썼습니다. 눈을 보호해주는 특수렌즈로 된 색 안경이니 시력보호에도 아주 좋습니다. 값도 비싼 것입니다. 250달러 주었습니다. 자~ 부담 갖지 마시고 받으세요” 그랬더니 그의 눈이 확 커지면서 갖고 싶은 얼굴표정이 확연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내 “괜찮습네다. 나도 평양가면 좋은 것 살수 있시요”하며 내 손을 밀친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때 나의 머리속에 번개처럼 스쳐가는 생각, “아차, 이곳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감시 카메라가 있구나!” 그렇게 하면서 얼마를 내려왔다. 길모퉁이 후미진 숲속, 나무들에 가려 시야가 불투명한 곳에 이르러 나는 다시 그에게 선글라스를 건넸다. “선생님 이곳에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습니다. 자 빨리 받으세요” 그러자 그는 잽싸게 나의 손에서 색안경을 받아서 자기 손 가방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선상님 정말로 고맙습네다. 선생님 마음을 받겠습네다. 잊지 않겠습네다. 고맙습네다” 그러고는 “사실 저희도 압니다. 미국이나 남조선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저는 잘 알고 있습네다. 남조선 방송을 몰래 듣기도 합네다. 내가 이런 말 했다는 것 절대 말하믄 안됩니다. 선생님을 믿고 하는 말이야요” “네 걱정 마세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합니다, 안심하십시오“ 서로 이러한 말을 주고받은 후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한편, 집사람과 함께 가까이 서서 내려오던 그 여성간부 동지 역시, 우리와 비슷한 대화를 집사람과 나누고 있었다. 미국 사는 이야기, 북한 속의 사회생활 이야기 등등 심지어는 음식과 부엌살림 이야기까지 여러 방면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내려오고 있었다. 나의 집사람 역시 그 여성간부가 불쌍히 보여서 핸드백에서 비상용으로 사용 할려고 넣어두었던 미제 화장품 몇개를 주니까, 처음에는 한사코 사양 했는데, 어느 후미진 숲속에 다다르자 잽싸게 받아 갔다고 한다. 이어서 미화 20달러두장, 40달러를 손에 쥐어주니 1초도 안 돼 어느새 그 돈은 그 여자 주머니속으로 들어갔단다. 그러면서 “아주머니 선생님 은혜 잊지않겠어요” 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우리나라에도 화장품은 있어요, 근데 품질이 안 좋아요, 대개들 중국 화장품을 외제품이라고 비싸게 사서 쓰는데, 그 언젠가 우연히 누가 남조선의 아모레 화장품을 주어서 썼는데 정말로 기차게 좋았드랬어요, 우리 북조선에는 기런(그런) 화장품 구경도 못해요“ ”어서 속히 남북통일이 되어서 기런 화장품 좀 맘대로 써봤으면 원이 없겠어요“.

사상이 다르고, 이념도 다르지만, 순수한 인간적 마음과 사랑은 국가와 사상, 이념을 초월하여 벽이 없이 통하는가 보다. 폐쇄되고 낙후된 사회생활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우수한 품질의 활용품을 갖게 되니 얼마나 감격스럽고 가슴 벅찬 일일까…….남들이 만져보지도 못한 그 좋은 제품들을 생각지도 않았던 미국에서 온 손님에게서 선물을 받게 되니 얼마나 기분 좋은일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우리 부부는 그들에게 “저 아래 내려가서 온정각 식당에서 점심대접을 해 드리고 싶다”고 했는데, 그것만은 한사코 사양했다.

절대로 관광객들과 식사와 접근은 안된다 고 말하며, 오늘 이렇게 서로 만나서 대화 한 것도 “안되는 일” 이라며 “너무나 고맙습네다. 인정 잊지않겠습니다”를 연발 했다. 어느 듯 대화 도중 아랫쪽 온정각이 가까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그들 남녀간부 동지는 눈동자에 눈믈을 글썽이며 “나중에 북남통일이 되면 꼭 찾아오십시요, 두분 잊지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들은 저쪽 길로 돌아서면서도 고개를 우리 부부에게서 떼지 않고 우리 부부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몇년이 흘러 지나갔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아직도 그들 남녀 간부 동지의 모습이 아련히 남아 있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76/20230927 <다음 주에 이어짐>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