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꿈과 희망을 갖고 사는 인생

<김명열칼럼> 꿈과 희망을 갖고 사는 인생

세상 살기가 참으로 힘들다고 많은 사람들이 호소하고 있다. 이렇게 힘들게 살다보니 행복도 없고 희망도 없다. 살아가는 생의 목적속에 꿈이나 희망이 없다면 이것은 완전 암흑속을 고통 중에 끝없이 헤매며 살고 있는 불쌍한 사람이다.

고통을 지식으로 승화시킨 철학이 바로 불교다. 한마디로 고(苦)의 철학이다. 태어남도 고통이고 늙음도 고통이며 죽음도 고통이다. 사랑하지 않는자와 만나는 것도,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다.

한마디로 일체개고(一切皆苦)다. 불교는 고(苦)의 실체를 개념화 하고 분류화 했다. 흔히 말하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가 대표적이고 후대 불전에 따르면 팔고, 18고 까지 망라되고 어떤 경전은 110고(苦)에 까지 이르고 있다.

고통을 강조하는 불교는 흔히 염세와 허무의 종교로 이해된다. 태어나는 것 자체도 고통이라니 세상을 살 이유가 없지 않나?하는 의문까지 든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을 고통의 바다(苦海)로 보는 불교철학은 삶을 기만하는 온갖 달콤한 환상들을 걷어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중에도 삶에 대한 열정과 희망을 버리지 말고 세상을 허무가 아닌 긍정으로, 염세가 아닌 낙천적 세계관을 모색하며 꿈을 갖고 살아가야 하겠다.

왜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전문가들의 말을 빌자면, ‘자살은 앞으로 희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슬픈 사람은 시한부 생명을 사는 사람이 이니라, 파산한 사람도 아니고, 꿈이 없는 사람이다. 꿈이 없는 사람은 내일이 반갑지 않고, 미래가 두렵고, 삶의 방향이 없다. 그러나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은 얼굴에 화색이 돌며 눈빛이 다르다.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평범과 비범의 차이다. 결국은 꿈의 차이다. 꿈이나 희망이 큰 사람이 큰 사람이 되고 성공하며 행복을 손에 쥔다. 꿈과 희망이 인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스위팅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40일을 먹지 않고서도 살 수 있고, 3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며, 8분간 숨을 쉬지 않고서도 살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단 몇초도 살수 없다. 희망이 없이는……….!

그렇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환경이라 할지라도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의 인생과 절망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의 인생 사이에는 도무지 메울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 실패를 성공으로 이끄는 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두 손일 때도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말, 그것은 세상에서 두 글자로 된 말 중에서 가장 좋은 말인 ‘희망’ 이라는 말이다.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자신의 작품에서 지옥의 입구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고 적었단다. ‘여기 들어오는 자들은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렇다. 우리는 늘 언제나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것 하나가 바로 희망이라는 단어다.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한 아파트에 사는 여류화가 존시, 심한 폐렴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그녀의 마지막 희망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담쟁이넝쿨 잎, 그녀는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도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존시에게 어느 화가가 나뭇잎 하나를 벽에 그려 심한 바람에도 견디어낸 진짜 나뭇잎처럼 보이게 하고, 이것이 존시에게 마지막 희망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O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의 주요 내용이다. ‘희망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은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탈리아 격언이 말해주듯이 인간은 누구나 O헨리의 존시처럼 희망을 먹고 산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여러 조건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와 명예와 권력이 성공한 삶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동경하는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철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잘 살펴보면 그들만의 철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잘 될 수 있다는 희망, 내가 꼭 이루고 말겠다고 하는 희망을 항상 품고 있다. 희망은 긍정적이며 미래 지향적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좀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며 나아갈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희망은 나의 존재를 확인할수 있게 하는 말이며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원천이다. 희망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좀더 발전하고 자신의 참 자아를 완성하게 해 준다.

희망이 없다면 삶의 존재 가치가 없다. 삶의 이유를 잃게 되는 것이며,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패배자로 느껴져 패배자로서의 자괴감마저 느끼게 된다. 그래서 희망은 인생의 꽃이요, 인생의 지침이요, 인생의 안내자이다. 희망은 내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하며 후회없이 살 수 있도록 독려하는 반려자이다. 인간이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끊임없이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하는, 그래서 앞으로의 상황 또한 변화시키는 원천인 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이라 생각한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거쳐 미래의 나를 바라보게 하는 확실한 지침서가 되기 때문이다.

지나온 희망적인 삶의 흔적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면, 미래의 나를 만드는 것은 희망을 품은 현재의 나이다. 희망은 끊임없이 자아를 돌아보고 자신의 역량을 연마하게 하는 소중한 자신인 것이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우리는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하지만 행복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모든 상황속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내가 속해있는 가정, 내가 근무하는 직장, 나와 관계된 모든 만남, 여러가지 속에서 느끼는 만족감이 바로 행복이다.

희망이 미래지향적이라면 행복은 현재 진행형이며, 개인의 삶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행복은 현재 자기자신이 어떤 가치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바른 가치 판단을 위해 철저한 자기 성찰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의 존재 가치는 어느 정도 되는가? 나는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가? 라는 깊은 자기성찰이 있어야만 한다. 부, 명예, 권력 등의 가치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행복의 전제조건인 진정한 자아성찰이 결여된 결과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는 국민이 방글라데시 국민이다. 그런데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다. 세계의 정치, 경제 대국인 미국도 아니고, 국민소득 1위를 달리는 스위스도 아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뭘까? 행복이란 자기만족이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만족이 지금 충분하다는 기분이 행복인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자기 성찰뿐 아니라 욕심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욕심도 필요하다. 자신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수 있기때문에 욕심도 필요하지만, 욕심은 순 작용보다 역 작용이 더 많기에 경계를 해야만 한다. 철저한 자기 성찰과 욕심을 버리는 마음가짐이 바로 행복의 전제조건이다. 행복이라는 현재의 상태를 앞으로도 계속 영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에겐 희망찬 미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2023년, 금년 한해도 이제 몇달 안 남았다. 며칠이 지나면 가을의 문턱인 9월달이 된다. 가을이 되면 무성했던 나뭇잎들도 한잎 두잎 져 간다. 우리들 인생도 저렇게 낙엽처럼 지지만, 우린 가을에도 희망을 갖고 겨울처럼 매섭고 추운 인생의 겨울도 이겨 나가자. 인생은 이룩하고자 하는 목표와 꿈을 향해 가는 여정이다. 우리의 삶을 이끄는 힘은 바로 희망이다.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은 어려움과 좌절에 맞서 강한 의지를 발휘하게 해주며, 끊임없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힘겨운 여정속에 희망을 찾기 시작한다.

이런 희망은 목표를 동반한 긍정적 행동으로 표현되어, 우리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미래의 가능성을 알게 해주어, 당시 어두웠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용기와 노력으로 충만한 삶을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72/20230830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