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추운 겨울, 나의 어린시절 아름다운 추억의 이야기들.

<김명열칼럼> 추운 겨울, 나의 어린시절 아름다운 추억의 이야기들.

설한풍(雪寒風) 몰아치는 추운 겨울, 그 옛날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도 추웠는지?…..이렇게 몹시도 추운 겨울이면 내가 살던 시골 고향마을, 나의 집에서는 삼시세끼 밥을 지을 때 외에도 가끔씩 군불을 땐다. 내가 살던 우리집 초가집은 대문을 끼고 있는 행랑채(사랑방=아버지가 주로 거주하심)가 있고 안채가 있었다. 안채에도 어느 때는 온돌방을 덥히기 위해 가마솥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군불을 땔 떄가 종종 있었다. 이렇게 군불을 때고 나면 안방의 아랫목은 따끈따끈할 정도로 온기가 돌아 방안에 있는 화로불과 더불어 너무나 따뜻했고, 가마솥에서 펄펄 끓었던 물을 바가지로 놋대야에 퍼 담아 광으로 갖고 가서 욕통에 채워 넣는다. 그러고 나서 식구들이 며칠에 한번씩 교대로 목욕을 한다. 이런 것을 두고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고 한다.

도랑치고 가재 잡듯이, 물을 데워 목욕하고 그 덕택으로 방안까지 따뜻해지니 운신하기에 불편함이 없다. 나의 어머니는 화롯가에 앉으셔서 식구들의 뚫어진 양말을 꿰매거나 솜바지 저고리를 수선하기도 했다. 군불을 때고 난 장작불(숯불)을 화로에 담아 안방으로 가져오면, 그 화로불에 고구마를 구어 먹으면 그야말로 ‘둘이 먹다 하나가 꼴까닥 해도’ 모를 정도로 맛이 있다. 군불은 안채에서만 때는 것이 아니다. 대문이 달린 사랑채에서도 소여물을 끓일 때 역시 군불을 지핀다. 사랑채에서는 아버지가 형이나 또는 마실온 이웃사람과 어울려 가마니 짜기에 여념이 없다. 방안이 따뜻해지니 일을 하는 능률도 오르게 된다.

우리 아버지는 가끔씩 짬을 내어 형과 나를 위해 팽이를 만들어주셨다. 소나무나 박달나무를 적당히 잘라내어 밑둥을 깎아 둥구렇게 만들고 그 아래에는 못을 박아 댓돌위에서 이리저리 돌리며 반질반질하게 만든 후, 팽이로 돌려 치면 잘도 돌아가곤 했다. 팽이치기와 더불어 딱지치기, 자치기, 연날리기 등등의 놀이를 하다보면 짧은 겨울의 해가 어느 듯 서산에 기운다. 검정 고무신에 내복도 없이 솜바지 저고리에, 코가 나오면 솜저고리 팔뚝에 쓱쓱 문질러가며 닦아내던 그 시절, 그 옛날의 어린시절 추억들이 요즘 같은 추운 겨울이면 주마등처럼 머리속에 떠오른다.

소나무를 때면 송진 묻은 소나무 냄새가 솔솔 나고 참나무를 때면 향긋한 참나무의 향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던 그 시절의 군불 때기………….. 이러한 아득한 옛날의 추억어린 이야기들은, 참으로 알 수 없게도 세월이 한참동안 몇십년이 흘러간 지금도 그때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한파가 매섭게 몰아치면 어느 때는 시도 때도 없이 군불을 때기도 했다. 저녁에는 화력이 오래가는 생나무나 장작을 충분히 때야 했다. 그래야만 추운 겨울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온돌방을 달군 열기는 이른 아침까지 남아있게 마련이다.

군불을 지피고난 다음 타고남은 불씨를 화로에 옮겨 담는 일은 작은누나가 했다. 나의 큰 누나는 이미 시집을 가서 남의집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늦가을에 볏가마로 가득히 쌓여있던 곡간은 정미소 방앗간에서 쌀로 도정한 후 광으로 옮겨져 쌀뒤주나 커다란 항아리 여러개에 나눠서 보관한다. 이듬해의 햇쌀이 나올 때까지 먹을 양식이기에, 쌀뒤주나 항아리 속에는 깐 마늘을 속속 박아 넣어놓는다. 이래야만 벌레들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볏 가마가 쌓여있던 헛간은 이미 비워져 그곳에는 장작이며 솔가지, 참나무 등의 땔감들로 차곡차곡 쌓여있다. 군불을 때거나 목욕물을 뎁히고 밥과 국을 끓이며 소여물을 삶을 때 요긴하게 쓰이는 게 이 땔감 나무들이다.

그 시절의 겨울나기는 땔나무와 아궁이, 가마솥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방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어 자리 잡고 앉아있는 질 화로에는 언제나 한쌍의 부젓가락, 혹은 인두가 꽂혀 있었다. 부젓가락은 불씨를 헤치거나 간혹 가래떡을 구울 때 요긴하게 쓰였다. 부젓가락 두개를 적당한 간격으로 벌려놓고 그 위에다 인절미나 방아 떡을 올려놓고 구우면 그 구수한 냄새에 정말이지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세모꼴 모양의 인두로는 밤이나 고구마를 묻어 굽기도 하고, 옷 팔소매를 다려 꺾거나 저고리 앞 동정을 여미기도 하였다. 그러한 일은 언제나 어머니가 떠맡았다. 인두질로 쭈글쭈글한 옷을 반듯하게 펴는 일은 어머니의 특기였다. 놋다리미가 있었지만 그 다리미가 닿지 못하는 부분은 인두질이 그만이었다. 솜바지 저고리 동정이나 학교에서 학예회 때 입는 양복과 셔츠를 반듯하고 멋있게 다려주시는 어머니의 옷 다루는 솜씨는 온 동네에서도 알아줄 정도였다.

부엉, 부어엉………. 밤이 깊어가면서 집 뒷산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우는 소리에 무서움이 더럭 솟아나곤 했지만, 따뜻한 화로와 아버지의 구수하고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무서움과 두려움이 어느새 싹 사라지곤 했다. 아버지의 옛날이야기, 귀신 나오는 무서운 얘기들을 따뜻한 화롯가에 앉아 듣다보면 어느새 졸음이 쏟아져 스르르 잠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옛날이야기는 재미있고 무섭고 때론 슬펐지만, 문풍지를 울리는 밤바람 소리는 매섭고 차갑기 그지없었다. 너무나 춥고 무서워서 오줌이 마려워 뒷간(화장실)에 가는 것이 귀찮아서 윗목에 갖다놓은 요강에 오줌을 누다 보면 어머니가 야단을 치신다. “초저녁부터 오줌을 요강에 누면 밤에는 한번 더 요강에 고인 오줌을 버리러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초저녁에는 아무리 춥고 힘들더라도 꼭 밖에 나가서 오줌을 눠라” 하시면서 역정을 내신 일이 여러번 있었다. 지금 세상에 아무리 깡 시골의 농촌이라 해도 한밤중에 오줌을 요강에 보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때 그 당시에는 어느집이나 이렇게 춥고 찬바람이 쌩쌩부는 겨울밤에는 필수품으로 요강이 방안에 들어와서 편리용품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마도 요즘에 이러한 요강을 보려면 박물관에나 가야 볼 것 같다. 초저녁이나 잠을 잘 때까지는 방안의 온돌이 식지 않아 따뜻했지만 새벽녁이 되면 온기는 사라지고, 방안에 놓아둔 주전자의 물이 꽁꽁 얼음으로 변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렇게 추운 방안에서 굼지럭거리며 이불속에서 못 나오고 있을 때, 새벽녁에는 어머니가 밥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그러한 아궁이에서 불타는 장작덩어리를 질 화로에 옮겨담아 아이들(자식들)이 춥지 않게 방안으로 갖다놓으신다. 잠시 후 방 안은 따뜻한 온기로 뎁혀져서 부지런히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아침식사 후 학교 갈 준비를 한다. 그 시절, 그때는 방안에 화롯불이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만큼 화롯불은 필수적인 난방 용품이었다.

옛날 그시절, 내가 좋아하는 놀이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연날리기다. 창호지에 대나무 살을 다듬어 만든 연을 들고 뒷산으로, 논밭으로, 뛰어다니며 띄워 올리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연날리기는 초겨울에 시작하여 이듬해 추위가 가시기 전까지 이어졌다. 바람이 쌩쌩부는 겨울날, 창공에서 곡예 하듯 묘기를 부리는 연싸움은 스릴 만점 그 자체였다. 얼레로 연실을 당겼다 놓았다 하며, 상승과 하강, 좌우로 빙빙 돌기. 전진과 후진 등의 갖은 묘기를 연출하다보면 어느덧 하루해가 다 지나간다. 춥고도 긴 겨울이었지만 이렇듯 각종 놀이나 기구들로 재미에 푹 빠져있는 동심의 뜨거운 열정은 겨울의 동장군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눈이 수북이 쌓인 날 아침, 누나가 짜준 털실 벙어리장갑을 끼고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잿빛토끼털 귀마개에 긴 장화를 신고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뒷동산 너머 멀리 산토끼 몰이에 나섰던 추억도 잊을 수가 없다.

토끼사냥은 겨울철이 가장 신나는 놀이였지만, 약삭빠른 산토끼를 잡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어린 우리보다 너댓살 위인 동네 형뻘 되는 청년들은 어떻게 잡았는지 산에 올라가면 어깨에 토끼를 한마리씩 메고 왔지만 우리 나이또래 친구아이들은 언제나 죽도록 눈속에 처박히며 고생을 했지만 토끼새끼 한마리 잡지도 못하고 헛탕만 쳐야했다. 나중에야 안일이지만 토끼란 놈은 뒷다리가 길어 산비탈 아래쪽으로는 잘 뛸 수가 없다. 그래서 아래에서 위로 몰아가는 것 보다 윗쪽에서 아래쪽으로 몰아가야 잡을 확률이 컸다. 청년들은 이런 방법을 진작 알고도 저희들보다 나이가 어린 애들이 눈속에 이리 자빠지고 저쪽으로 넘어져도 토끼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산속을 헤매는 꼬마들의 토끼몰이 하는 모습을 보며 낄낄대고 재미있게 구경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산에 나무를 하러다니시며 산토끼가 다니는 길목을 잘 알고 있는 나의 아버지는 칡넝쿨로 올가미를 만들어 가끔씩 커다란 산토끼를 잡아 오실 때가 여러번 있었다. 어느 때는 한꺼번에 세마리나 잡아오신 적도 있었다. 이렇게 토끼를 잡아올 때면 오랫만에 집식구들이 토끼 도리탕을 만들어 고기맛을 즐기며 행복한 식사시간을 가질때가 있었다. 집 근처의 수수밭이나 콩밭에는 꿩도 자주 나타나서 놀다 가곤 했는데, 꿩도 사냥감으로는 그만이었다. 하지만 꿩 또한 토끼만큼이나 예민하고 민첩해서 손으로 잡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이따금씩 서울 손님들이 엽총을 들고 와 사냥개를 풀어놓고 꿩을 잡아갔는데, 워낙에 꿩이 많다보니 그들이 사냥해서 잡아간 꿩보다는 못 잡은 꿩의 숫자가 훨씬 더 몇십배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흰콩에 송곳으로 구멍을 파고 그 안에 싸이나(푸른색 독약)을 넣은 다음 겉은 촛물을 녹여 막고 밭이나 논 등의 꿩들이 잘 나타나는 곳에 싸이나를 넣은 콩을 반듯한 돌 위에 엎어서 올려놓으면 꿩들이 와서 주워 먹는다. 콩을 주워 먹은 꿩은 얼마 못가서 날개를 푸드덕 거리며 픽픽 쓰러져 죽었다. 지금 같으면 불법으로 처벌을 받았겠지만 그 당시엔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겨울은 깊어갔고, 이제는 시간과 세월이 꽤나 많이 흘러간 지금 생각해 보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때 그 시절, 그 겨울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 ‘추억’이란 말은, 그 말 자체만으로 충분히 애틋하고 아련하다. 이미 지나간 시절, 지나간 일들, 이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일이기에 추억은 마음속에 자리를 잡아 보이지 않는 뿌리를 내린다. 그래서 잘못했던 일, 부끄러웠던 일, 즐겁고 재미있었던 일, 슬펐던 일, 가슴 벅차고 보람 있었던 일 등의 일을 한 이, 모두가 기꺼이 말한다. ‘추억은 아름답다’ 라고….!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44/2023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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