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춘화 현상(Vernalization / 春花現象)

<김명열칼럼> 춘화 현상(Vernalization / 春花現象)

춘화현상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추위에 잘 견디는 작물들의 대부분은 어느정도의 낮은 온도에 노출되어야 생육상 전환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저온에 감응하여 꽃눈이 분화하고 꽃이 피는 현상을 춘화현상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초빙교수로 살다가 귀국한 세계적인 정신의학계 교수에게 한국인의 이미지가 어떠냐고 묻자, 한국인은 너무 친절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판단하면 큰 오해다. 권력이 있거나 유명한 사람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지만 자기보다 약하거나 힘이 없는 서민에게는 거만하기 짝이 없어 놀랄 때가 많다. 특히 식당 종업원에게는 마구잡이로 무례하게 대해 같이 간 사람이 무안하고 불쾌할 정도다.

잘 나가는 엘리트일수록 이 같은 이중인격자가 많다. 잘 알지 못하는 사이이거나 VIP인 경우는 난감하다.

한국에서 엘리트 계층에 속한다면 배운 사람이다. 배운 사람일수록 겸손해야 하는데 오히려 거만을 떤다.

지식은 많은데 지혜롭지가 못하다. 말은 유식한데 행동은 무식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준법정신이 엉망이다. 힘 있는 사람부터 법을 안 지키니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 밖에 없다.

대법관으로 임명된 인사가 청문회에서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를 인정할 정도이니, 정부요직에 있는 다른 인사들이야말로 말해서 무엇 하랴. 한국 엘리트들의 또 다른 모순은 자기의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점이다. 회사에서도 뭐가 잘못되면 전부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탓이고 자기 반성은 조금도 없다. 세상 모두가 남의 탓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너무 네거티브 하다. 사람들이 모여 앉으면 정치 이야기를 많이들 하는데, 완전히 흑백논리로 평한다.

호남친구들을 만나면 박정희, 박근혜를 싸잡아 혹평하고 욕하고 하는 것, 그걸 듣다가 시간 다 가고……. 경상도 친구들과 만나면 김대중과 문재인을 씹어댄다. 한국에는 존경받는 대통령이 한사람도 없다. 모두가 이래서 죽일 놈이고 저래서 나쁜 놈이다. 국민들의 소득은 3만달러 이상인데 국민의식은 500달러 수준이다.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했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곧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벼락부자의 단점은 무엇인가? 그저 남에게 내가 이만큼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성공의 의미가 너무 좁다. 돈 있고 잘 사는데도 자기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항상 배가 아프고 뭔가 불만족이다. 춘화현상(春花現象)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자기집 앞마당에 옮겨 심었다. 이듬해 봄이 되었다.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덕분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보다 더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다.

첫해라서 그런가보다 여겼지만 2년째도 3년째도 꽃은 피지를 않았다. 그리고 비로써 알게 되었다.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오스트렐리아) 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온을 거쳐야만 꽃이 피는 것을 전문용어로 춘화현상(Vernalization)이라고 하는데, 철쭉, 개나리, 진달래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우리들의 인생도 마치 춘화현상 같다. 눈부신 인생의 꽃들은 혹한을 거친 뒤에야 피는 법이다. 그런가 하면 봄에 파종하는 봄보리에 비해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나는 가을 보리의 경우 수확이 훨씬 더 많을 뿐 아니라 맛도 더 좋다.

인생의 열매는 마치 가을보리와 같아 겨울을 거치면서 더욱 풍성하고 견실해진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많이 이기고 헤쳐 나온 사람일수록 강인함과 향기로운 맛이 더욱 깊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실이 젊은이들이 짊어지고 겪어야 할 춘화현상 이라면 감내해야 할 세대들이 갑갑하게만 느껴진다.

옛날 중국 장자의 지락(至樂) 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 바닷새(海鳥)가 노나라 서울 교외에 날아들었다. 노나라 임금은 기뻐하며 친히 이 바닷새를 자신이 거하는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왔다. 술을 권하고 제례악인 구소의 음악을 연주해 주고, 제사음식인 소와 양 돼지를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 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점 먹지 않고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사흘만에 죽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만의 방법인 부양으로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기른 것이 아니다. 무릇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신에게 알맞는 조건이 있다. 무엇인가를 진정 아끼고 사랑한다는 건 그 대상에 다가가 생태적 삶의 조건을 이해하고, 내가 아니라 그에 맞추어주는 것을 말한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다양하게 체험하고 실패한 후 오는 선물 같은 거다. 특히 가장 갈등이 심한 관계가 가족관계다. 전혀 다른 환경과 성격을 갖고 살아왔던 남남지간의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면서 가정을 이룰 때 자신만의 고집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뼈저린 체험을 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에도 춘화현상이 존재한다고 보고 싶다. 인생의 눈부신 꽃도 혹한을 거친 뒤에야 피기 때문이다. 현실은 매우 어둡고, 내 뜻대로 안되며 시간이 갈수록 미래는 더욱 어두워만 보이고, 성공에 대한 확신 또한 없는 상태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하다 보면 꽃과 열매가 맺히는 화려한 봄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우리들 개인을 떠나, 나라의 흥망성쇠도 춘화현상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한국) 역사 이래 지난날 끝없는 고난을 겪은 후 반세기만에 기적 같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이룩했다. 아마도 긴 세월 모진 고난을 겪으며 형성된 국민성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작금의 나라 상황은 어떤가? 코로나19와의 전쟁은 끝을 알 수 없고, 경제와 일자리는 바닥을 치며, 세계의 정세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위중하다. 그런데도 국민은 편을 갈라 갈등은 심화되고, 공직자들의 부정과 불법은 갈수록 만연되며, 국민화합에 앞장서야할 정치는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며 방향을 잃고 있다.

그간의 과분한 호강으로 국민정서가 벌써 해이해진것은 아닐까 실로 걱정이 앞선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이럴 때 하늘에서 영웅이라도 내려와 나라를 구해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민족의 국민성은 아무리 싸우다가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단결하는 불사조 기질의 DNA가 있지 않던가!. 그 좋은 예로서 임진왜란 때는 전국 방방곳곳에서 평민들이 의병을 일으켜 목숨 걸고 싸웠고, 1997년 IMF 때는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에 동참하여 외환위기로부터 탈출했으며, 2002년 월드컵 대회 때는 국민 모두가 “아 ~ 대한민국”을 외치며 일치단결해 축구 강국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꺾고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뿐만 아니라 2007년 충남 태안 앞바다 원유 유출사고 때는 200만이 넘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몰려들어 서해안을 뒤덮은 12000키로 리터의 기름을 일일이 닦아내어 100년내 회복이 불가능할거라는 세계인의 우려를 무색할 정도로 10년도 되기 전에 완전회복 시키는 기적을 이루기도 했다.

최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여권의 대권주자 독주 체제 하에서 전격 지지율 1위로 등극했다. 그는 살아있는 정권의 비리와 불법을 수사하다 고초를 겪어, 예전의 정객들과는 자생력이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최재형 전 감사원장도 정치에 때묻지 않은 신선함을 선물해 주며 국민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옳고름이 혹한을 견뎌낸 춘화현상과 같은 신비와 갈망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맺을지는 더두고 볼 일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시(詩)도 있고 노래도 있다. 정말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꽃의 향기가 백리를 간다고 해서 화향백리(花香百里)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사람의 향기는 발이 없고 바람이 없어도 만리를 간다고 해서 인향만리(人香萬里) 라는 말을 낳았다. 아 ~ 그렇다면 이렇게 만리나 가는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는 어떻게 하면 피어나는 걸까? 존 밀러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있다”고 했다. 악취냄새가 진동하는 사람들이 가득히 살고 있는 이 세상에, 그렇게 향기로운 사람들 곁에서 머물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살벌하고 인정이 메마른 세상을 살면서 외로움을 느낄때면 그런 향기로운 사람이 지극히 그립다.

하루중 가장 어두운 시간은 해뜨기 바로 직전의 시간이다. 우리가 봄을 그리도 좋아하며 기다리는 까닭은 겨울이 혹독하게 춥기 때문이다. 만약 겨울이 춥지 않다면 봄도 조금은 덜 반가울지 모른다. 고난과 행복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심리학자 칼 융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정도 어둠이 있어야 행복도 존재한다.

행복에 상응하는 슬픔이 없다면 행복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고난이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고난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고난이 나에게 유익이 될 수 있고, 무익한 것이 될 수 있다.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는 참으로 맑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일생을 질병의 고통속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가 고통 속에서도 견디며 오히려 꽃을 피운 춘화현상의 시(詩)이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 아프지 않으면 뵙지 못할 성안이 있다. 이 시를 읽고 있는 순간 성경말씀의 이런 구절이 머리에 떠 올랐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구약성경 욥기 23장 10절 말씀)”.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1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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