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 문필가의 행복론(幸福論) <1>

김명열 문필가의 행복론(幸福論) <1>

 

드리는 말씀 ~ 지난 8개월 반동안 34회에 걸쳐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 기행문을 애독자 여러분들의 성원과 관심속에 보람있게 잘 마치었음을 감사드리며, 이어 행복론에 관해 3~4회에 걸쳐 연재를 해드리겠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단지 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행복을 꼽기도 한다. 그런데 ‘행복을 원한다’는 말을 뒤집어 보면 현재는 ‘불행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에게 불행은 당연한 말인 듯 하다. 사회는 우리를 끊임없는 경쟁속으로 밀어 넣고, 주변 환경을 빠르게 변화시키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언제 얻게 될지도 모르는 행복을 위해서, 현재의 불행을 받아들여야 할까?.

사람은 두가지 방식으로 사고한다. 하나는 생각을 기준으로 경험을 판단(개념주도적 처리) 하고, 또 다른 하나는 경험을 기준으로 생각을 수정(자료주도적 처리)한다. 예를 들자면 자신의 글에서 오타를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개념주도적 처리 때문이고 타인의 글에서 오타를 쉽게 발견하는 이유는 자료주도적 처리를 하기 때문이다. 장기나 바둑을 직접 두는 사람보다 훈수를 두는 사람이 수를 잘 보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처음에 감사할 일을 찾아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충 찾아본 후 “없다”고 한다. 자신의 삶에서 즐겁고 감사할 일이 없다는 평소 생각(개념주도적 처리) 때문이다. 하지만 사소한 것이라도 찾으려고 자신과 주변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자료주도적 처리)한~두개정도는 찾을 수 있다. 없을 줄 알았는데, 발견하게 된 새로운 경험은 감사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게 만든다. 결국 자신에게도 감사거리가 넘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감사가 풍부해지면 우리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감사와 연관되는 다양한 감정으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행복이다.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에 따라서 함께 묶여있다. 한가지 생각을 하면 그와 관련된 사건이나 이미지 느낌이 연달아서 떠 오르는 것이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한번 시작된 감사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고마운 마음과 즐거움, 기쁨, 설렘 등 온갖 긍정적인 정서와 기억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며 특히 그중에서도 긍정적 정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행복에 닿게 된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이 행복으로 전이되는 것이고 이것이 감사를 회복할때 행복을 느끼게 되는 원리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지난 여러 달 동안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기독교유적지 순례여행 기행문을 써 올리면서, 아주 옛날의 구약시대 또는 예수님 시대의 그 당시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을까?. 40년 동안의 유대광야 생활속에서도 그들은 과연 행복했었을까?. 모든 자원이나 물품들이 너무나 부족한 상황속에서, 오늘날처럼 물질문명 속에 도취된 사람들의 사고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 속에 그들은 오직 모세의 지도하에 메시야(하나님)만 의지하며 믿음의 굴곡속에 힘겹게 살던 그 때의 생활들이 진정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생활이었을까? 하며,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통틀어 엮어서 그들의 행복에 대해 순례여행 동안 참으로 많은 생각들을 해봤다. 아주 옛날의 그 당시 사람들은 과연 그들 역시 행복을 위하여 어떻게 노력했으며 어떠한 삶이 그들에겐 행복이었을까? 하고 이면적인 생각도 많이 했었다. 이번에 참고로 행복론(幸福論)을 연재하면서 행복에 대한 나 개인 나름대로의 생각과 판단, 경험적인 삶의 흐름속에서 느끼고 얻은 결과들을 자료로 정리하여 행복론을 이어 가겠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등 따시고 배부르고 새끼들과 오순도순 사는 것이 행복” 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지식인들은 자기의 마음속에 존재하며,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것이고 반대로 생각하면 불행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리스 토텔레스는 행복은 전 인격의 완성을 말하며, 최고의 선이 행복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욕심을 끊고 스스로 만족하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행복이란 사유와 관념속에 존재하지만 순간적이어서 항상 행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어렵게 산다고 불행한 것이 아니며, 왕이나 재벌가라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가 현실의 자기 위치에서 좀 더 나아지려는 욕망을 가지고 산다. 만약에 그러한 욕망조차 없다면 죽은 사람이 된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믿으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한 삶에 대한 욕구는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나타나기 때문에 항상 마음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사람들은 부귀를 탐하고 공명을 탐하며 살고 있다. 그것을 욕할 수는 없으나 지나침이 있을 때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몽롱한 상태로 봉황의 꼬리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현자(賢者)들은 속세를 초탈하려고 노력하며 명리나 영욕을 추구하지 않는다. 욕구가 너무 지나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은 평범한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더 큰 허상을 쫓아다니며 평생을 고생하며 살게 마련이다. 그렇게 보면 나 역시 바보처럼 이루지 못할 허구를 추구하며 평생을 살아온 것 같다.

행복은 가장 낮은 것을 얻고자 할 때 찾을 수 있고, 평범한 것에 있으며,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 있다가 순식간에 멀리 도망을 가기도 한다. 자기의 마음속에 있고 가난하다고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며 권력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행복이라는 욕망은 작은 하등단계에서 자아욕구가 실현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행복해질 확률이 가장 높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눈높이를 최대로 낮출 때 거기에 행복이 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모든 정열과 물질, 그리고 시간을 다 소비한다고 해서 행복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항상 살고 있는 삶속에서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살아갈 때 크고 작은 행복이 얻어진다. 그렇다면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여서 행복론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다.

우리의 몸에는 3대 영양소가 있다. 즉 그것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다. 이렇게 우리들의 몸에 3대 영양소가 있듯이 행복에도 행복을 위한 3대 영양소가 있다. 그 3대 영양소는 자유, 유능, 관계이다. 이상의 3대 영양소는 나 나름대로 정의를 지어 언급하는 것이지 사람마다 그 기준이나 가치와 목적 또한 다를수 있음을 아울러 말씀드린다.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다. 세상에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보다 불행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불행을 느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불행을 많이 느낄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자유가 아닌 어느 제3의 원인이나 장애물로 인하여 억압과 통제를 느끼는 순간 불행을 느끼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의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나 의지가 아닌 억지로 뭔가를 해야 할 때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구속을 받는 일상들이 온통 내 삶의 전부를 지배하고 뒤덮을 때 말할 수 없는 불행을 느끼게 된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들이 없고, 해야만 하는 것들로 가득차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시들게 돼있다. 때문에 행복의 첫째 요소인 자유는 내 자신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서 자의에 의해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상태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러한 자유는 나의 영혼을 살찌우며 살아가는 희망과 낙을 제시해주는 핵심 삶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두번째 행복의 조건으로, 영혼의 영양소는 유능이다. 나의 영혼을 살아서 숨쉬게 만드는 에너지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데 ‘성과가 난다, 내가 잘한다’이다. 누구나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때 ‘불가침’ 표현을 역린(逆鱗)이란 말이 있다. 역린이란 뜻은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의미한다. 이것을 인간사에 비유한다면, 군주의 약점, 임금의 노여움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아예 거론도 하지 말고 거슬리지도 말라는 이야기다.

옛날 중국의 한비자(韓非子)의 세난편(說難篇)에서 유래된 내용은 이렇다. 무릇 용이라는 동물은 동물을 길들이면 사람이 타고 다닐 정도로 온순한 짐승이다. 그러나 턱 밑 언저리에 직경이 한자나 되는 비늘이 거슬러 나 있어서, 만약 이를 건드리면 곧 물어죽이고 만다. 임금에게도 이 같은 역린이 있어 유세하려는 자는 임금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행복의 세번째 영혼의 영양소는 관계이다.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타인들과의 관계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인간관계가 서로간의 돈독한 관계로 이어질 때, 즉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때 우리는 삶의 에너지가 생성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태어날 때부터 타인의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의존적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은 가족, 연인, 친구, 지인, 직장동료 등등과 사회를 구성하여 서로 상호 작용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다양한 인간과 상호작용을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좋은 인간관계는 원만한 품성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먼저 나 자신부터 품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자기만의 견해나 관점을 떠나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자신에 대해서도 바르게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즉 자기의 좋은 점과 부족한 점까지 볼 줄 안다면, 타인역시 훌륭하고 귀중한 사람으로 보면서 사람들과의 이해를 통해 인간관계의 깊이와 폭을 넓혀 나갈 수 있다. 당장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 자신을 다스려 간다면 인간관계는 좋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의 힘으로 인격을 다듬어가야 한다. 특히 남의 말에 귀 귀울이면서 열려있는 사람이 돼야 하고, 타인의 말에서 자기의 단점까지 바꿀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사회공동생활을 하면서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기위해서는 내가 먼저 인격자가 되고 남들이 호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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