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가을이 머무는 곳에서……

<김명열칼럼>  가을이 머무는 곳에서……

 

파아란 하늘밑에 펼쳐져있는 가을이 아름답고 곱게 물들어가고 있다.

초목과 산천이 고운색깔로 채색되어가듯 무르익어가는 가을의 자연동산이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가을빛깔로 갈아입고 있는 풀포기와 나뭇잎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무심코 바라보고 있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놓아주지 않는다. 언제 저리도 영롱하게 물들여진 것일까? 누가 저리도 곱게 치장을 해놓은 것일까? 자연의 위대성에 감동할 뿐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섭리속에 자연의 순환과 변화로 물들여진 가을빛깔이 역력한 초목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공연히 마음이 울적해진다. 특정한 대상이 없는 막연한 그리움이 앞서게 되어 가슴속이 뭉클해진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을 확인하다보니, 올해에도 이렇게 속절없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가는 세월을 잡을 수 없어 야속한 마음을 주체하기가 어렵다. 가을이 하순으로 접어드는데도 3계절의 모습과 색깔을 드러내고 있는 스모키마운틴의 풍광이 아름답다. 산꼭대기 윗자락에는 이미 단풍이 들었다가 떨어져버린 앙상한 가지의 잔해로 겨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산중턱은 온갖 각종의 물감을 쏟아 부은 듯 알록달록 여러가지 색깔들로 물들여진 초목들의 모습이 가을이 한 복판에 와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산 아래쪽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시냇물을 배경으로 한 산천의 풍경은 아직도 늦여름철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듯 녹색을 머금은 푸르름이 따가운 가을햇볕에 조는 듯 평화롭게 널부러져 있다. 모든 풍경들이 자연의 조화속에 눈이 시리도록 파란하늘과 참으로 잘 어울려 보인다.

이 가을의 수채화속에 나 또한 하나의 그림이된다고 생각하니, 우울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일상의 무겁고 힘든 짐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한없이 가벼워진 어깨에는 날개가 펼쳐져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다는 착각을 느낄 정도다. 한여름 내내 열기를 뿜어대던 지난여름의 향기는 그 어디에서도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다는 사실이 마음 한 구석에서는 허전함과 아쉬움으로 마음마저 아프게 한다. 흐르는 강물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번 지나간 시간 역시 마찬가지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소중한 시간들…. 소중한 시간을 마음에 간직하기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곱게 물들여 지고 있는 가을빛깔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해본다. 지금 이순간의 시간을 성실하게 채워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된다. 지금보다 더 귀중한 시간은 없다. 내일은 아직 도래하지않은 가상의 현실이고 지나간 과거는 허상에 불과하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 현재가 실상이다. 오늘을 소홀하게 보내는 것은 진짜로 허상으로 바꾸는 일이다.

화려하게 꾸며진 꿈이나 영상을 쫒느라 실제의 삶을 놓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라 하겠다. 오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주어진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채워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가을을 사랑하는 것은 오늘을 소중하게 채워가는 일이다. 오늘을 꽉 채운다는 것은 가을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을을 온 몸으로 사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기쁨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마음에 각인된 가을은 그리움으로 남아서 영원할 것이다. 곱게 물들여지고 있는 이파리들을 바라보면서 가을을 사랑하게 된다. 가을은 몸이 먼저 느끼게 되나 보다. 열대야에 지쳤던 몸이 신선한 바람에 새 기운을 얻고, 몸이 새 기운을 얻자 비로써 정신도 맑아지는 듯 한 기분이다. 짧다고 보면 짧고, 길다고 보면 길다고 느껴지는 가을을 보내며, 가을은 빛깔이 가장 다채로운 계절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봄의 빛깔은 연록이고, 여름빛깔은 초록이다. 그리고 겨울의 빛깔은 하얀색이라면 가을의 빛깔은 여느 계절보다 다양하다. 그 빛깔들은 하나같이 장엄하고 농익은 빛깔들이다. 내 삶 어느 언저리 어딘가에도 저렇듯 농익고 아름다운 진지한 빛깔이 들어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저런 맛을 다 보며 살아간다.

단맛, 쓴맛, 신맛, 매운맛, 짠맛이 고루고루 섞여있는 것이 우리네의 삶이다. 나이에 따라 그 어떤 맛이 더 강하고 약할 뿐이다. 20대까지의 삶이 단맛이라면, 50대까지의 삶은 쓴맛도 보고 매운맛도 보고 짠맛도 보는 삶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50대이후 60~70대는 신맛이던가? 아니면 시금털털하고 뜨뜻미지근한 싱거운 맛?……….. 한창 왕성하게 일하고 정년을 맞아 은퇴를 하고나면, 대개들 바람 빠진 풍선이나 헐거워진 고무신짝처럼 용도를 잃은 기계와 같이 멈춰 서서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젊었을 때는 쓴맛의 커피나 설탕없이 마시는 블랙커피도 곧잘 마셨으나,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든 것이 단맛이 들어있지 않은 음료수나 커피, 빵 종류는 시선에서조차 멀어진다. 젊었을 때는 단맛에 산다고 했는데, 나이가 들어 단맛을 찾는다는 것이 어불성설 같게 느껴지기도 한다.

설탕이 무척이나 귀하던 시절, 나의 어린시절에는 설탕대신 사카린을 설탕을 대신해서 많이 사용했다. 빵을 만들 때도 그렇고, 감자떡을 만들 때나 보리 개떡을 만들 때도 사카린을 넣고 단맛을 냈다. 뿐만 아니라 개구쟁이 어린이들은 사이다 병에 맹물을 가득 담아 넣고 그 안에 사카린가루를 털어 넣고 힘 있게 흔들어서 사카린가루를 녹인 다음 그 물을 사이다처럼 단 맛을 음미하며 수시로 마시곤 했다. 맹물에 사카린을 탄 맛, 그게 뭐 그리 맛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때는 먹을 것이나 음료수 및 주전부리가 넉넉지 못한 때라서 그 맹물의 사이다는 꿀맛 그 자체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간 지금에와서도 그때를 회고해 생각을 해보면 그때 그 시절에 마셨던 사카린 사이다 맛처럼 달고 맛있는 음료수나 사이다는 요즘 세상에 찾아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그 단맛이 어린 시절 아무런 세상걱정 없이 천진스럽게 뛰어놀던 때의 추억어린 단맛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나서 진정한 단맛을 보기위해서는 쓴맛부터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매사가 다 쓴맛을 알아야 그 후에 단맛을 맛볼 수 있다는 거였다. 쓴맛 없는 단맛은 결코 세상에는 없다. 실패라는 쓴맛을 보지 않고서는 성공이라는 단 맛을 맛볼 수 없었다. 어릴 때 단맛부터 맛본 탓으로 어른이 되어 맛보는 쓴 맛은 더욱 더 썼다. 인생의 단맛부터 맛본 이는 쓴맛을 견디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우리들 인생에는 실패가 많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과정일 뿐이다. 과정을 실패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할 뿐이다. 작은 실패의 냇물이 모여 큰 성공의 강물이 흐른다. 따라서 아무리 쓴맛을 보더라도 참고 견딜 줄 알아야한다. 세상에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고통이나 힘이든 과정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젊은이라면 누구나 고통속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통이나 역경은 인생의 쓰디쓴 국이고 밥이라는 사실을………. 그 국과 밥을 먹음으로써 인생이라는 생명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젊을 때부터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오직 최선과 일등에게만 관심을 갖지만, 신은 자신을 견디고 극복한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또 신은 가끔은 인간에게 빵 대신 돌멩이를 던진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이는 그 돌을 원망하며 걷어차 버리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고, 또 어떤 이는 그 돌을 주춧돌로 삼아 집을 짓는다고 한다. 나는 신이 관심을 갖는 인간이 되고 싶다. 신이 던진 돌멩이로 빵을 만들어 먹는 인간이 되고 싶다. 쓴 맛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설탕 맛을 모르므로, 오늘의 쓴맛을 내일의 단맛으로 만들고 싶다.

이 가을에 잠시 생각속에 머문다. 세상의 삶속에서 잠시 나의 욕심을 내려놓고 내면에 있는 나는 누구며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그 본질을 성찰해야 할때다. 인생은 짧다. 집착과 갈등속에 살다가 늦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속절없이 떠나갈 수 는 없지않은가?…………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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