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들에 피어난 야생화(들꽃)를 보면서…………

<김명열칼럼> 들에 피어난 야생화(들꽃)를 보면서…………

밖으로 나가보면 산이나 들, 고속도로변 등에는 요즘 들꽃인 야생화가 아름답게 피어나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집밖의 오솔길, 산책길, 공원길, 들길을 걷다보면 들풀과 들꽃들을 헤아릴 수 없이 만날 수 있다. 그 풀과 꽃 이름이 무엇인지, 그러한 야생화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기도 하다. 시골에서 낳고 자라난 탓인지, 나는 그래도 들꽃이나 야생화의 꽃 이름은 도회지에서 사는 사람들보다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이 아닌 이곳 미국에 와서 살면서보니 도대체 어느 꽃이 그 꽃이고, 저 꽃이 내가본 꽃인지? 전혀 모르겠다.
어릴 때 울안에 있던 채송화, 맨드라미, 봉선화, 백일홍, 원추리, 분꽃 등등…….뒷동산에 올라가면 지천으로 밟히던 패랭이, 제비꽃, 할미꽃, 진달래, 철쭉, 신나리가 이제는 머나먼 옛날의 고향땅 추억속의 꽃들이 되었다. 삶의 태도가 진지하지 못할 때, 서당의 훈장으로 학동들을 가르치던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아이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며 “이름 없는 들꽃(들풀)같이 스러지고 싶으냐?”고 나무라시던 모습을 종종 본적이 있었다.
물론 맞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들꽃은 이름 없이 스러지는 것이 아닌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연을 아름답게 꾸미며, 비바람에 흙을 보호하여 땅을 지키는데 한 몫을 하고, 동 식물을 키우는 소중한 역할을 한다. 산이나 들에 야생초가 없다면 그나마 이 지구가 온전히 지탱해 나갈 수 있을까?.
들풀이나 들꽃(야생화)이 작은 것은 비바람에 잘 견디기 위해서일까. 동물들에게 짓밟혀도 다시 일어설 수가 있기 위함인가. 커다랗게 자라고, 크게 꽃이 피면 다른 생물의 눈에 잘 띄어 곧 꺾어질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야생화는 돌보는 이 없어도 끈질긴 생명을 이어오고 있나 보다.
‘야생초 편지’를 쓴 어느 시인은 야생화를 보면서 “이 땅은 온갖 금, 은보화가 가득한 신비의 곳간처럼 여겨진다”고 했다. 이곳 미국 땅에 살면서 접해보고 들어보는 야생화, 들꽃들의 이름은 모두가 어설프고 낯설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의 한국 땅에서 피어난 신토불이 들꽃들의 이름은 예쁘고 재미있다. 은방울꽃, 봄맞이꽃, 애기 팽이밥, 둥굴레, 은난초, 초롱꽃, 나팔꽃, 함박꽃, 할미꽃……..예쁘고 재미있는 이름이 한도 없다. 여우 오줌, 소경불알, 중대가리, 개불알꽃, 며느리배꼽, 며느리밑씻개, 애기똥풀, 말대가리, 멍텅구리,…..듣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는 이름도 있다. 개불알꽃은 넓적한 잎에 진분홍빛깔의 꽃잎을 밑바탕으로 꽃잎이 둥글게 모여 꽃술을 감싼 모양이 꼭 개불알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쁜 꽃의 생김새와는 전혀 딴판의 이름을 갖고 있지만 위트가 있어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어느 집에 놀러가서 보면 자연 속에서 잘 자라는 식물을 캐어다가 화분에 심어놓거나 수석이나 돌 틈에 붙여서 억지로 키우는 것을 보면 답답하다. 가장 자라기 좋은 환경에서 마음 놓고 편히 비바람 속에서도 잘 자라고 있는 식물을 가져다가 집안에 가두어놓고 혼자만 감상하며 즐기려는 것은 퍽이나 이기적이다.
몇년전 LA 동창 친구 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몇몇 사람들이 동호회를 만들어서 휴일이 되면 산에 올라가 돌을 채취(수석)하고 산채를 해오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멀리 깊고 높은 산에 들어가 비싼 난을 캤다고 자랑을 하지만 키우지도 못하고 죽이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산채 다니는 한인들이 이곳 미국에도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있으니 자생 난이나 휘귀종의 식물들이 멸종하지 않고 견디기는 힘들 것이다. 야생으로 자란 식물을 집에 심으면 살리기가 힘들다. 들이나 산에서 함부로 꺾거나 파서 가지고온 식물이 멸종되어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야생화의 수난도 이젠 끝나야 한다. 자연에서 채취하여 인공적으로 기르려면 잘 자라는 좋은 여건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많은 노력과 기술, 시간과 재료가 투자되어야 한다. 자연 상태에서 몇년씩 공들이고 길러야 꽃 한포기 피우는 야생화도 있다. 야생식물은 자연 속에 있는 그대로 놔둔 채 즐기고, 전문가들이 상품화하려고 번식시킨 것을 구하여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야생화에 대해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성과 마음, 사랑과 자랑으로 번식시키고 보호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보고 즐기며 감상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하찮은 들꽃 하나하나에도 조물주인 하나님께서는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꽃은 온 인류와 함께 긴 세월을 살아왔기에 꽃의 발자취 뒤에는 인류가 걸어온 길이 숨겨졌던 인간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꽃은 인류에게 예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기에 꽃을 가리켜 문화의 지표라고 이야기한다. 신선하고 향기가 좋으며 빛깔 좋은 것을 생명으로 하는 꽃은 항상 우리 곁에서 인간생활의 정서를 윤택하게 해 활력소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내면적, 미적 요소를 충족시켜주는 것뿐만 아니라 내면적,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도 성서에서 꽃과 나무, 자연의 곤충, 짐승들을 비유하여 하신 말씀들이 많다.
특히 인간들은 꽃에 대해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연상적으로 표현하고자 해 문인들이나 화가들은 이를 예술의 소재로 즐겨 사용했던 것이다. 특히 서양에서는 꽃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온갖 사물의 생명력으로 인식하고, 동양에서는 외면적 형태보다는 정신적인 면을 암시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아무리 하찮은 것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소중한 것이 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보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해와 달은 매일매일 뜨고 진다. 사람들은 해와 달을 보며 꿈꾸고 내일을 살아간다. 그러나 같은 해와 달이라도 의미를 부여하거나 담아주면 전혀 다른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 특히 요즘 같은 여름철에 들과 산, 여기저기에 질펀하게, 또는 다소곳이 외롭게 피어난 야생화를 눈으로만 보지 말고 이 아름다운 꽃들이 상징하는 소리와 향기를 귀로, 가슴으로, 마음속으로 느껴보길 바란다.
꽃은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그리고 겨울에도 핀다. 꽃은 들에도 피고, 나무에도 피고, 우리들의 마음이나 얼굴이나 손에도 핀다. 봄이 되어 피는 꽃은 온 누리에 따스한 기운이 고루 퍼지는 숨결을 알려준다. 우리의 얼굴에 피는 꽃은 즐겁거나 환한 마음을 알려준다. 피어난 꽃을 보는 마음은 이유 없이 행복해진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푸르른 녹색의 잎새 모습은 그대로 싱그러움이 되고, 자연이 주는 사랑과 평화는 언제나 끝이 없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너무나 아름답다. 인간의 욕심이나 손때가 묻지 않은 야생화는 이름조차 요구하지 않으며 조용히 피어나서 조용히 져간다. 모진 풍화에 뿌리를 내리고,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싹을 틔운다.
이제부터는 주위에 무심코 피어난 야생화에 눈길을 돌려보자.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야생화는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화려한 꽃들이 아무리 뽐을 내도 모방하지도 않는다. 조용히 나만의 장점을 살려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야생화는 사랑이고 자비이며 배려이다. 겨우내 웅크렸던 새싹이 봄이 되면 아지랑이 속으로 솟구쳐 올라온다. 여름에는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성장하며 가을이 오면 오색빛깔의 아름다움을 주고, 겨울이면 모든 것을 다 주고 더 내줄 것이 없는지 살핀다. 답답하고 힘들며 속터지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닌 요즘 세상에, 무한한 생명력으로 기쁨을 주는 자연의 선물, 야생화나 들꽃은 얼어붙은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온기로 채워주는 값진 선물이다. 계절은 금방 지나가는 것 같지만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꽃은 지기 마련이지만 돌아오는 계절에 다시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준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다. 시련이 있으면 그 끝에는 반드시 행복이 있는 법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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