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칼럼> 당신은 일꾼입니까? 일감입니까?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이 땅에 세워진 첫 지상교회는 열린 구조의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가급적 모든 의견수렴 과정이 투명하고 열려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오픈 된 공간, 오픈된 의결, 오픈된 피택의 과정을 가졌음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직분자를 선별하는 자격과 규정은 오늘날과는 판이하게 달랐던 것 같습니다. 사회적 지위나 교회에 돈 많이 기부하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직분을 주는 일은 없었습니다.

교회는 지금 보다 힘을 더 빼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의 교회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남긴 유산물이 아닙니다. 특히 교회가 가진 무소부위의 절대적 권력은 천주교회의 유산이자 교회를 타락시킨 가장 최악의 제도 중 하나입니다. 진정한 교권은 권력과 제도가 아닌 바로 성령으로부터 와야 했었습니다.
초기교회는 성령님이 교회의 권위와 지도자들의 권위를 세우셨습니다. 그때 교회의 권위는 지상 어느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그 위력은 대단했었습니다. 교회는 소수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성도들이 참여함으로 세워지는 공동체이자 몸입니다. 그것이 비록 위험이 따르고 혼란을 야기 시킨다해도 그렇게 함으로 발생하는 문제보다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발생하는 문제가 더 심각하고, 우리를 더 곪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든 재정은 투명해야 하고, 교회가 부여받은 주님의 명령을 성취하는 일에 부합하도록 사용되어야 하며, 사사로이 목사를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일꾼, 특히 항존직이라 불리는 일꾼을 세우는 일에 엄격해야 하며,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내편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교회를 세속적으로 타락하게 만들고 교회의 권위를 무너트리는 도미노의 점화선이 될 것입니다. 목회자 중심의 힘을 분산하고 나눔으로 모든 교회 운영을 풀어줘야 합니다. 함께 만들고 더불어 만들지 않으면 수동적 교인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타 주에 살 때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인즉 어떤 분이 장로를(오해 마십시오. 많은 장로님들은 그런분들이 결코 아닙니다, 간혹 그런분이 계실 뿐입니다) 돈으로 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확인해 보았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개척 교회하시는 목사님께 어떤 분이 와서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어려운데 저희 몇 가정이 이 교회로 옮기면 30명이 오게 되는데 대신 조건은 장로 한 분, 권사 두 분을 세워달라는 조건이랍니다. 개척해 고생하시던 목사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자녀들은 아버지를 장로 만들고, 어머니는 권사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CCC에서 내적 치유강사와 충주지부를 책임졌던 주서택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목사님은 몇 안 되는 사람이 모여 개척 예배를 드리고 들어온 첫 헌금의 60%를 외부로 흘려 보냈다고 합니다. (저희도 아직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 결심한 그 결심을 지금교회가 성장하고 부흥되면서도 똑같이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신다고 합니다. 타협은 끊임없는 자기 도피와 핑계거리를 만들지만 결단은 타협의 끈을 끊어 버리게 만듭니다.
가급적 매주 목요일은 가까운 동네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몇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당연히 그 주 설교를 준비하고, 가능한 하루 종일 다른 것의 방해받지 않고 말씀을 묵상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잇점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도서관에서 책 읽고, 공부하는 학생들의 분위기 속에 있다 보면 나 역시 더 젊어지고, 활력을 얻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로 한쪽 책장에 진열되어 있는 장서들 때문입니다. 책들이 주변에 가득하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나의 지식이 더하는 것 같고, 풍성한 자원을 얻을 수 있는 깊은 우물가에 있는 기분을 만끽하기 때문이다.
저의 서재에는 그리 많지 않는 책들이 진열 돼있습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장에 주인이 찾고, 눈에 발견되는 책이 몇 권이나 될까요? 사서 한번도 안 읽혀진 책, 보다만 책, 이리저리 낙서가 된 책, 책장 한 켠에 수년 동안 쳐 박혀 있는 책, 그 수많은 책들이라도 주인의 손에 뽑혀 읽혀져야 비로소 책으로서의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유독 제가 좋아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늘 제 눈에 잘 띄는 곳에 둡니다. 벌써 구입하고 읽은 지가 수십 번이건만 또 손이 가고 잃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책이 책장에 있다고 다 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읽혀져야 비로소 책으로서의 가치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저 책장을 장식하기 위한 책은 장식품이지 책이 아닙니다.
그 책에는 숨겨진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숨겨진 생명을 찾아내는 사람만이 그 책을 비로소 읽는 것입니다. 장식장에 꽂혀있는 또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대부분 한주에 한번 관심을 가지는 책입니다. 한주간 단위로 그 책에 대한 존재는 인식될 뿐입니다. 바로 성경책입니다. 늘 가까이 있으면서도 먼 당신과 같은 존재가 바로 성경입니다.
구약에서는 만나를 주셨을때 매일 그것을 먹나 먹지 않나 시험해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 동역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쓰셨다가는 자기 맘대로 문제 일으키고, 불협화음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일명 일감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꾼입니까? 일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늘 동역하고 싶어하는 일꾼이 되야 합니다. 그분에 손에 늘 띠고, 손에 잡고, 놓고 싶지 않은 책 같은 일꾼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일감은 어떻습니까? 트러블 메이커입니다.
아나 무인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봉사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합니다. 완장만 찾다 하면 온갖 전횡을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일감 같은 사람들은 그 책을 저 멀리 두고, 한주에 한번 들고 다니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뜻이 무엇인지,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가 만들어 낸 방식의 내 성경, 내 복음을 따라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꾼은 주인의 의도와 마음을 잘 앏니다. 그 사람은 바로 그 분의 마음과 뜻을 기록해 놓은 책장에 그것을 덩그라니 꽃아 놓지 않고 꽂혀진 하나님의 말씀을 꺼내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것을 지켜 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주님의 교회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꾼입니까? 아니면 당신 자신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일감입니까? <946/0930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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