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꾸러기의 짧은 글 긴 생각> 삶의 허구에서 벗어나라

이경규목사 / 서울 새로운 성결교회 담임
환타지아 1.

오늘 연합집회에 갔다왔다. 수천명이 모여서 찬양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열광적인 찬양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나의 감정과 상처를 만지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울컥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수많은 무리들이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 참으로 하나님이 손에 잡히는 듯 했다. 곧 이어 이어진 설교는 부흥과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설교자의 강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설교내용이 일부 난폭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가슴이 후련하다. 모임이 끝나고 늦은 시간에 전철을 탔다. 모임 올 때 지나쳤던, 걸인이 또 동냥을 한다. 처량한 곡조에 맞추어 지친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집회에 참석하러 올 때와 마찬가지로 주머니 속의 동전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그냥 지나쳤다. ‘저 걸인들이 한달에 버는 수입이 수백만원씩 된다’는 신문기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환타지아 2.

어떤 탈렌트 장모가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수백억에 해당하는 복권이 당첨됐다는 소식이후 내가 그 돈이 생기면 무엇을 할까 자주 생각해 본다.
1/10은 십일조를 하고, 1/10은 내가 사랑하는 가난한 선교단체에 낸다. 그리고 나머지 반 정도는 일생동안 돈 걱정 안하고 살 수 있도록 저축한다.
나머지로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재단법인을 만든다. 그리고 그 재단을 통해 이웃과 민족 그리고 세계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것이다.
전철 내릴 역에 도착했다. 매표소 복권 판매대 앞에서 2-3초 망설이다가 주위에 혹시 아는 사람이 없을까 힐끔 보다가 그냥 지나쳤다. 다음에 꼭 사야지.

환타지아 3.

기왕에 시작한 목사의 길이니 성공하기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어디가도 목에 힘주는 목사는 되어야지. 돈이 필요한 곳에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는 여유 있는 목사가 되어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한 1,000명 모이는 교회는 가져야겠지. 그런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재 한국 교회의 80%이상이 100명미만 교회란다. 1000명이 넘는 교회는 1%도 안 된단다. 과연 나는 1%에 속할 수 있을까?
꿈깨자.
허구투성이다.
광고나 SFC영화에서만이 아니다.
우리 삶의 대부분이 그렇다. 허구와 과장 투성이다.
우리 역사가 뻥도 쳐야하고, 힘있는 척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월이었기에 그렇다고 해도 너무하다. 포장은 한번만 해도 되는데 서너번 씩 한다. 광고를 보면서 무엇이 과장인줄 알면서도 슈퍼에 가서는 바로 그 물건을 산다. 광고대로 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세상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안에도 영락없이 허구와 과장 투성이다. 의미없이 반복되는 높은 기도소리, 무엇인가 심오한 진리를 발견한 것 같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에 불과한 설교, 다른 장소에서 들으면 신변잡기에 불과한 설교가 웅장한 교회당과 가운 입은 설교자의 입을 통해 나올 때 애써 의미를 부여하려는 성도들의 눈초리, 쓸데없이 커다랗게 지어 논 교회당이 허구다.

하나님은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했는데,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산 제물이 되도록 하는 일보다는 그 몸이 잠시 머물 교회당 건물이 더 큰 신앙의 실재로 자리 잡고 있다.
성도들은 집회에서 지붕이 무너질 것 같은 찬양의 기백이 있지만 집회장을 떠난 후에 그들은 사회 속에서 유약하기 그지없다.
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인간의 내면을 조용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실재가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의 교회는 힘의 실재를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다.
모이는 숫자가, 강단에 오르는 헌금의 부피가, 겉치fp의 찬사가 힘이 있는가?
사실 이런 과장과 허구는 공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결국 오늘 교회의 허구의 문화는 두려움의 결과이다.
자신을 과장하고 치장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고립됨의 결과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자신의 상처 받음을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상처 받은 결과이다.
헨리 나우엔이 말한대로 진정한 치유자는 상처 입은 치유자이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구원의 진정한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 진정한 상처의 회복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은 과장하고 꾸며야만 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과장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두려움과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이미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나와 공동체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한다.
리스도 안에서서의 진정한 자기 정체성과 평화를 경험한 자만이 허구의위 비실재가 주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과장된 형식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참 자유와 해방을 주는 실존하는 영향력으로 다가갈 때 세상은 비로소 교회를 향해 올 것이다. <944/0916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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