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마음이 따듯한 사람(惻隱之心人)과 차가운(非情人)사람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한국의 진도 앞바다에서 조난된 세월호 침몰로 인하여 보여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적인 노력과 자원봉사자들의 숨은 미담을 보면서 가슴 뭉클함을 느꼈으며 아직도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고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많은 인정과 인심이 메마르지 않은 좋은 세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얼마 전 고통 중에 힘든 일을 당하면서 메마르지 않은 따듯한 세상의 인정과 사랑을 직접 체험할 수가 있었다. 나는 일주일전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을 하여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을 앞둔 환자의 입장이 되고 보면 누구에겐가 위로를 받고 싶고 따듯한 사랑의 말을 지주 삼아 힘을 얻고 불안감과 두려움을 해소시키고 싶은 심정이 본능일 것이다. 그리고 종교를 가졌건 아니가졌건 간에 하나님을 찾게 되고 자신을 위한 기도와 무사를 바라는 것 또한 당연한 바래움이고 소망일 것이리라. 어렵고 힘들거나 고통 중에 처한 사람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 서서 나는 교회의 교우들이나 이메일을 주고받는 지인들에게 나의 현 실정을 설명 드리고 위로와 힘을 받을 수 있는 따듯한 마음의 배려와 수술이 잘되기를 비는 기도를 부탁드리는 말씀을 드렸다. 어찌보면 이런 부탁은 조금은 낯간지럽고 결례가 되는 부탁일지는 모르겠으나 나 자신은 이번 일을 계기로 사람들의 사랑과 마음을 알고 싶었고 반응이 궁금했다. 내가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간다고 하니 대부분의 지인들과 교인들께서는 걱정이 담긴 위로의 말과 소망, 축복, 무사, 건강을 기원하는 기도와 따듯한 마음이 담긴 사랑의 말씀을 해주시고 힘과 의지가 되어주셨다. 너무나 눈물겹도록 고마웠고 은혜로웠다. 그러나 개중에는 바쁘셔서인지, 아니면 자기일이 아닌 관심밖에 일이라서 그런지 일언반구의 답변조차 주지 않는 분들도 있었다. 평소에 내가 스승님처럼 모시고 가깝게 지내는 이선생님과 신선생님이 계신다. 그 어르신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병은 자랑하고 선행은 숨기라”고 하셨고, 말씀을 이어서 “자기가 안 아프면 관심 밖의 남의 일로 치부하는 몰인정한사람도 있기 마련” 이라시며 “땅바닥에 떨어진 인심을 탓하기보다 메말라진 인정 속에 살아가는 병이든 그네들이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마음에 병이든 그 사람들은 현대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자들이라고까지 하셨다. 허지만 이런 마음의 가난한사람들은 일부에 지났고 대부분의 많은 분들께서는 나의 일이 자기일인 것처럼 걱정을 해주셨고 따듯한 말로 위로를 해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그분들의 간절한 기도와 성원, 사랑에 힘입어 수술은 잘되었고 건강한 몸으로 귀가하여 휴식을 취하며 여러분들의 따듯한 마음과 사랑을 감사드리고 하나님께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일상으로 돌아와 생활하고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아직도 세상은 따듯한 세상이고 인정이 메마르지 않았으며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온정을 실천하는 선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의 세월호참사 사건으로 인하여 보여준 전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 따듯한 마음, 측은지심의 마음은 세계 곳곳의 지구촌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여 애도를 표하고 인정의 물결이 삭막하고 메마른 이 세상을 사랑으로 덮고 남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여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마음이 따듯한 사람, 온유한 사람, 그런 사람은 사랑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온유함은 인내심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났을 때 마음의 여유는 없어지고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조급함이 찾아오며 조급할 때 감정의 통제력을 잃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인내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공간이 조금씩 커지며 또 기다리는 마음으로, 믿는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지금까지 나를 멘토 해 주신 분들이 참으로 많다. 그리고 그분들은 모두 다 선하고 온유하신 분들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분들은 나를 만났을 시 그때의 모습에서 기대하는 게 아닌 장차 소망하는 그 모습을 믿고, 그랬기 때문에 항상 실수하고 교만하고 무례한 모습 가운데서도 그 인내심을 잃지 않고 나를 받아주시는 것 같다. 마음이 착한 사람은 따듯하다. 남을 이해하고 아픔을 같이하며 어렵고 힘들 때 힘이되 주는 사람은 사랑이 있기에 따듯한 사람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은 차갑다. 남을 미워하는 사람, 남을 비방하는 사람, 나밖에 모르며 사는 사람은 차갑다. 너무 비판적인 사람은 맑고 찬물 같아서 사람이 모이지를 않는다. 물이 지나치게 맑고 차면 고기가 살지 않는다. 지나치게 인정이 없고 나밖에 모르며 비판적인 사람은 주위에 사람이 없다. 그 이유는 그렇게 냉소적이고 남을 이해 못하며 자기 위주로 사는 사람은 마음도 폐쇄적이고 자신의 주위에 남들이 접근 못하도록 울타리를 쳐놔서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도 않아서 혼자서 늘 외로우며 마음은 차갑게 쓸쓸하게 살고 있다. 그런 사람을 좋아 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중국의 현인에게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현인은 제자에게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고 남에게 인정을 베풀며 따듯한 마음을 베풀며 사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따듯한 것을 좋아한다. 차가운 것은 싫다. 역시 차가운 사람도 싫다. 몸이 따듯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 따듯한 것이다. 만물은 따듯한 기운에 소생한다. 겨울은 춥다. 그리고 차갑다. 차갑기 때문에 모든 것이 딱딱하다. 반면에 봄은 따듯하다. 따듯하기에 부드럽고 온화하다. 우리는 따듯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사랑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반면에 시비지심(是非之心)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
시비지심은 남을 비방하고 자신만 위하고 사사건건 옳고 그름을 따지며 사는 사람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경우와 상황에 따라서 이야기이다. 우리는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가면서 서로를 소중히 아끼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야한다. 타인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타인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
나보다 먼저 항상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넓은 마음이 되어야하겠다. 내 자신이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가슴을 지녔는지, 그리고 타인에게 얹잖은 말을 들었더라도 그것을 다 포용할 수 있는 넓은 경지가 되어있는지 돌아보아야겠다.
어차피 이 세상을 당당히 살아가야 하기에 서로 공경하며 사랑하며 좀 더 따스한 마음으로 감싸주며 살아가야겠다. 기쁨보다 아픔이 많고 번뇌와 슬픔이 많은 이 세상이다. 참고 인내하지 않으면 이별이 많을 수밖에 없는 세상인 듯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세상, 생각하면 한숨만 나오는 이 세상, 하지만 아직은 따듯한 사랑을 갖고 그 사랑을 베풀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에 살아볼 만한 세상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myongyul@gmail.com> 928/0520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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