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방황하는 사람들(1)- 아둘람굴같은 교회가 있다면…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교회를 다닌다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회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제가 살던 동네 에 한국신학대학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쪽분야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분이 함석헌씨입니다. 그분이 주장하던 것이 바로 무 교회주의입니다. 이 주장은 신학교에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던 주제였고, 교회들은 위기감을 가지고 실랄하게 비판의 날을 세웠던 핫 이슈였습니다.
제가 살았던 시카고에는 윌로 크릭교회라는 대형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한인들이 무려1000 여명이나 다닌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인사역을 하는지 물었습니다. 아니랍니다. 한인교회에서 어려움 당한 사람, 시험 당한 사람, 싸움에 진저리가 난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들어 그렇게 늘어난 것이랍니다. 미국교회에서는 그런 한인교회가 연구대상이 된지 오래입니다. 공연히 무 교회주의자 는 아니지만 오늘도 주일마다 방황하고 있는 분들을 여기 저기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왜 교회가 깨지고 부서지고, 성도들은 목자없는 양들처럼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일까요?
그런 사람들은 좋은 가십(?) 거리가 됩니다. 때론 도마위에 올려놓고 비판, 판단을 합니다. 소문도 냅니다. 듣지 말아야 할 말들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해 댑니다. 정말 아이러니입니다.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일은 교회가 제일 앞장서 합니다. 와! 이 정도면 교회는 더 이상 주님의 말씀도 안 듣는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요?그런데 정말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정말 문제아(?)일까요? 정말 복음에 아무런 유익이 못 되는 사람들일까요? 아님 목사들의 이를 갈게 할만한 사람들일까요? 그들은 정말 괴물들일까요?
교회가 그들을 잃어버린 것은 다른 몇 사람을 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정말 그들에게는 교회를 교회답고, 유익하게 하려는 가능성은 없었을까요? 설령 방황하는 분들이 정말 문자 그대로 문제아라도 해도 교회는 그들을 품는 최소한의 “의무적 사랑” 이라도 있어야만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적극적인 찬동자들일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때론 부정적이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다수의 찬동자들의 의견보다 훨씬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부정도, 반대도 하지 않습니다.
어쩜 방황하는 사람들 중에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가능성을 맘껏 발휘해 볼 수 있는 교회 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다소 부정적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 여러분들이 꿈꾸는 교회가 있습니다.

삼상22장2절 “환난당한 모든자와 빚진 모든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었더라” 이것이 아둘람교회 성도들의 면면입니다. 한마디로 가능성 안보임, 헌금 못 낼 사람들 뿐, 봉사 맡기면 치고 박고 쌈박질만 할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그 굴 교회를 담임하는 다윗이 볼 때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인위적으로 양육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울고, 들어주고, 노래하고, 웃고, 장난치면서 서서히 그들로 웃게 만들었고, 자신의 내면을 열게 만들었습니다. 자밖에 모르던 사람들을 다른 사람을 향해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이해하고 돕는 사람들로 만들어 냈습니다.
한번도 자신을 존중히 여김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존중히 여겨주는 목자를 만난 것입니다. 자신들의 입장에 서서 그 편이 되어주는 영적 아비를 만난 것입니다. 그들안에 숨겨진 가능성이 하나씩 일어나 기 시작합니다. 어느덧 그들은 점차적으로 왕국의 건출한 장군, 용사, 지도자들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아둘람 굴 같은 교회! 상상만 해도 신나고 멋지지 않습니까?

이땅의 교회가 이런 교회들이 되기를 꿈꿔봅니다. 그 굴교회에서 이땅의 교회의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가진자의 교회, 힘있는 사람들의 교회, 많이 배운 사람들만의 집단이 아닌 누구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안에 숨겨놓으신 놀라운 가능성을 밖으로 끌어내는 사람들이 살맛나는 교회, 연약함 그대로를 받아주는 다니고 싶은 교회, 내 목숨을 받쳐 충성하고 싶은 교회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주신 예수님께 목숨 내놓는 것 아깝지 않는 교회가 된다면 흩어져 유리하는 성도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게 될것입니다. 소문을 듣고 더 많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돌아올때 이제 먼저 온 사람들은 그들의 맨토가 되어 그들을 돕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분들을 맞이할 따뜻한 가슴과 품만 준비되어 있다면 이땅에 세워진 교회도 살맛 한번 제대로 느낄 수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되지 않을까요? <894/090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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