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교육에 앞장서 온” 탬파 통합한국학교

“민족교육에 앞장서 온” 탬파 통합한국학교

 

광대한 미국의 대륙 동남부 플로리다 반도의 근해에 넘실거리는 대서양의 검푸른 물결을 붉게 물들이며 임오년(壬午年) 새해 아침의 태양이 솟아오른다. 이 상하(常夏)의 땅 플로리다 주의 멕시코 만(灣) 쪽에 자리잡고 있는 천혜의 해안도시 탬파 일원에 둥지를 틀고 있는 1만여 명에 달하는 한인 동포들의 새해 맞이는 9.11 대미테러 사태로 추락한 경기와는 반비례로 더욱 발랄하고 영롱한 꿈으로 부풀어 있다.

이 희망찬 새해 아침, 미주 한민족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우리 한인 커뮤니티 2세의 뿌리 교육을 지향하여 1996년 출범한 탬파 통합한국학교의 신년 계획은 이 지역 전체 한인사회 발전의 요람이자 포석(布石)이라는 점에서 임오년 모두(冒頭)의 관심을 끈다.

미주 한인 이민사를 일별(一瞥)하면 각 지역마다 한인사회가 형성되면 먼저 교회가 들어섰고, 곧 이어 각 교회는 어린이 교육을 위한 한글학교를 개설함으로서 미국에 이민 와 살면서도 민족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는, 그래서 한민족의 강인성과 교육열을 확인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되었다.

탬파의 경우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각 교회의 한글학교가 교육 자료와 교사 확보 및 지속성과 전문성 등의 제약을 받는 현실적 인식이 공감대를 이루면서, 1996년 초 이 지역의 교회협의회 목사님들이 모여 논의한 끝에 이 같은 제약을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 그 해 3월 16일 ‘탬파 통합한국학교’가 설립되었고, 초대 교장에 서진희 선생 그리고 이사장에는 신용창 선생이 취임하였다.

설립 목적은 한글 교육을 통해 조국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2세들에게 교육시켜 이들의 정체성 확립하는 것을 표방했다. 그 동안 탬파 통합한국학교는 해를 거듭하면서 장족의 발전과 많은 결실을 거두어 왔다.

오는 1월 5일(토)에는 지난 2000년부터 탬파 통합한국학교 교장으로 시무해 온 김파울 선생의 퇴임과 서울대를 졸업하고 카이저에서 화학 박사학위를 수여받고 캘리포니아 대에서 교수로 봉직하다가 현재 남 플로리다 대학교 교환교수로 와 있는 공역식 박사의 교장취임을 기리는 이취임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김파울 교장은 공영식 박사가 한인 2세 교육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극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파울 선생은 한동안 이 학교의 총무로 봉사하다가 2000년 3월 교장으로 정식 취임하여 지난 2년간 교장선생님으로 수고하시면서 많은 공적을 남기고 이번에 공영식 박사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되었다. 김 선생은 앞으로도 계속 통합 한국학교의 이사로 남아서 학교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탐파 통합한국학교는 플로리다 주 정부에 비영리 교육법인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플로리다 주 내 22개 한국학교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타 지역의 한국학교가 일년 9-10 개월의 수업을 하는 데 비해 11개월 수업을 실시하고 있어, 이 학교의 교장과 재무부장, 그리고 담임교사, 음악, 무용, 체육, 컴퓨터 등 특수 과목을 맡고 있는 교사 13명, 보조교사 3명, 행정 보조 1명 등 총 17명의 스태프가 “보다 좋은 아카데미”를 만들기 위해 남달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통계로서 웅변해 준다.

이 학교에는 3세부터 시작되는 유치반, 기초반, 중급반 1, 2, 고급반 1, 2, 그리고 성인반이 있으며, 특별 활동반으로 음악, 무용, 체육과 컴퓨터 반이 있다.

플로리다 주 정부 관계자들을 비롯하여, 미 주류 사회가 탐파 한인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상징하는 대표적 기관으로 손꼽고 있는 탐파 통합한국학교는 매주 토요일 9시 30분부터 오후 2시 15분까지 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탬파 한국통합학교는 한국 문화와 전통, 역사를 교육하고, 미국의 다문화 사회에서 민족의 얼을 계승하고 정체성을 확립함으로서 코리언 아메리칸으로서 자부심을 갖도록 민족언어 교육과미국 시민으로서 바른 언어생활을 하도록 영어교육을 시키는 등 전인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전 미국의 교계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제리 폴웰 목사가 총장으로 시무하고 있는 버지니아 주 린치버그에 소재한 리버티 대학교에서 경영정보학을 전공한 김파울 선생은 1999년 고등부 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하면서 탐파 통합한국학교와 첫 인연을 맺었다.

김 선생은 부산 동래 태생으로서, 부친이 한국의 성서침례 신학교 교수로 봉직할 당시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6학년 때 다시 고향의 학교로 옮겼다. 목사인 그의 부친은 1983년 필리핀에 단기 선교를 가셨다가 그 곳의 한 마을을 방문하여 극한적 빈곤을 목격, 큰 충격을 받으시고 귀국했다.

그의 부친은 필리핀의 빈민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가운데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누가복음 10장 2절)는 예수 님의 말씀에 따라 여러 목사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84년 6월에 선교사 비자를 받아 전 가족을 이끌고 필리핀으로 향했다.

부산 연산동에 위치한 미션스쿨인 브니엘 고등학교 1학년을 3개월 다니던 김파울 학생은 이때 필리핀의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에 9학년으로 전학하기 위해 전입 시험을 쳤는데 성적이 좋지 않아 입학이 불허되었다.

그래서 외교관이나 상사지사 주재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인터내쇼널 스쿨에 가는 초이스 밖에 없었는 데 이 학교는 학비가 몹시 비싼 관계로 가난한 선교사의 아들이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시 미숀스쿨의 카운슬러를 찾아가 간청을 했다. 전입시험 결과를 다시 검토한 학교 당국은 김파울 학생의 영어 점수는 미약하지만 수학 점수가 우수한 것을 발견하고 이를 참작해서 입학을 허락했다. 이때 그는 정말 일생 일대의 고통을 경험했다.

필리핀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귀국하여 한국의 대학을 다니고 싶었으나, 1988년 5월 졸업 무렵 한국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격렬해서 학업에 정진할 분위기가 못 된다고 판단, 미국의 몇 학교에 지망을 했는데 마침 리버티 대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아 그해 가을학기를 맞춰 도미했다.

가난한 선교사의 아들인 그의 수중에는 5백 달러가 전부였다. 비행기 환승을 위해 로스앤절러스 공항에 내렸는데 워싱톤 행 비행기를 두 대나 놓쳤다. 당황한 나머지 필리핀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필리핀에서 옆집에 살던 한 선교사님이 로스앤절러스에 계시는 것을 알고 연락을 하여 다음 비행기 연결 시간에 다 되어 이 목사님이 급히 뛰어와서 반갑게 만나 인사를 드리고 위로를 받았다.

헤어질 때 이 목사님이 봉투를 하나 손에 쥐어 주셨다. 이 봉투에는 9백 달러의 ‘거금’이 들어 있었다. 이 어린 학생은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비행기를 놓치고 시작된 미국 생활에 좌절했던 그는 다시 용기를 얻게 되었다.

“아직까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도움을 입었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서 저도 남에게 도움을 끼치며 살아야 되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당시의 아찔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한국 유학생으로서 병역의무를 다 하는 것이 떳떳하리라고 생각한 그는 1993년 귀국하여 육군에 입대했다. 제대를 하고 다시 리버티 대학의 학업을 계속하려 했으나 그가 전에 받던 장학금이 취소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장학금은 한 나라에 한 사람에게 주는 귀한 인터내셔널 워크 스칼라십이었다. 수업료뿐만 아니라 식사비까지 제공되는 특수 근로장학금이었다.

그래서 도미를 미루고 설탕 제조업체인 삼양사 간부들의 영어 교사로 그리고 초등학교 특활 영어교사로 봉직하여 돈을 저축하여 1996년 겨울 도미하여 학업을 마쳤다. 졸업 후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지도교수들과 상담하는 과정에서 리버티 대학교 대학원에서 카운슬링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이 대학원의 첫 학기가 거의 끝날 무렵 텍사스에서 학교를 다니던 여동생이 친구인 탬파 한인제일침례교회 오승일 목사님과 한국의 유명 가수 출신인 방은미 사모님의 딸을 방문하였다가 오빠 자랑을 한 것이 “묘약”이 되어, 방 사모님이 1998년 1월 린치버그의 김파울 학생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몇 분의 대화를 나눈 후 뉴욕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귀가하여 같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신부감’ 이보금 양을 소개받았는데 그녀와의 첫 데이트에서 “첫 눈에 반해” 전격 졀혼하는 바람에 그는 탬파에 안주하게 된다.

김파울 선생은 곧 전공분야의 컴퓨터 회사에 취직하고 부인은 약사로 일했다. 이 같은 인연으로 김 선생은 탐파 한인제일침례교회를 열심히 섬기게 되었다. 탬파 통합한국학교가 제일침례교회의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서진희 교장선생님께서 저에게 혹시 우리 한글학교에서 일 할 생각이 없는 지 특히 고등부에 선생이 없어 진행이 안 되고 있는 데 고등부를 맡아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저는 그 부탁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지요. 그래서 1999년 봄에 고등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국학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학교 운영과 교과 편성 등 정보의 디지털화 작업에 적극 동참하면서 총무 일도 맡아 하다가 정식 이사회의 추천과 투표를 거쳐 2000년부터 이 학교의 교장으로 봉직하게 되었다.

현재 이 학교에는 70-75명의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있다.

김 교장과 탬파 통합한국학교 스태프 진의 ‘열정’을 증거 한 일화가 있다. 지난 해 7월 26일부터 28일까지 워싱톤 디시에서 미국과 캐나다 전역으로부터 약 400여 명의 한글학교 선생들이 모여 재미 한글학교 협의회 19회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모임에 탬파에서 17명의 교사와 이사들이 참가했었다. 대회 마지막 날 폐회식에서 동 협의회 임선자 회장이 단일 학교의 대표가 이렇게 많이, 더구나 비행기 여행까지 감행하면서, 참석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고 소개를 받고 열 띈 박수를 받았다.

김파울 교장은 이 학술대회에서 “한국학교에서의 컴퓨터 활용방안”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이 때 행한 강의의 구체적 내용을 묻자 그는 “저에게는 하나의 모토가 있습니다. 그것은 21세기 교실에서 21세기의 교사가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치자는 것이지요” 라고 설명했다.

이 모토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21세기 교실을 강조한 것은 한글학교가 재정적으로 충분하게 후원을 못 받고 있는 점을 대외적으로 알려 교육환경을 개선하자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한국학교는 자체 건물이 없는 학교가 거의 90퍼센트이고, 그러다 보니까 교육에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쾌적하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닌 한글학교도 많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교실에 들어오면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을 갖도록 수업환경을 만들어 주자는 것이지요.”

“그리고 21세기 교사를 강조한 것은 교사들이 변화에 민감해야 되는 데 교사들이 19세기 사고방식을 가지고 강단에 서서 지도한다면 21세기 학생들과 갭이 생기 게 마련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 학생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그것을 근거로 학생들을 가르친다면 학생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교육의 질을 올릴 수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김파울 선생은 교장취임을 하면서 두 가지 약속을 했다.

멀티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는 수업모델을 연구하여 이를 실천하여 학생들이 흥미를 가지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 수업모델을 전통적인 방법, 즉 텍스트 위주의 환경과 비교해 볼 때 더 큰 학습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교사의 강의주도식으로 일방적이고 평면적인 데 이 틀에서 벗어나 멀티미디어를 통해 상호작용의 입체적 수업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교사가 주입식으로 강의하는 데서 탈피해서 교사가 던진 주제를 학생들이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방법을 적극 도입하는 것이다.

이것을 현실감각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그리고 체감으로 깨닫고 배우도록 부추기는 방법이다. 종래의 수업방안이 경직된 수업운영이라고 한다면 첨단 멀티미디어를 활용하는 방법은 학생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계발하는 학습자 중심의 “열린” 교육방법이 된다고 그는 강조한다.

김 교장은 교사위주가 아니라 학생위주의 학습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적극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학교 시설을 보강하기 위한 김 교장의 노력은 전천후 적이었다고 알려졌다. 그는 그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을 만나 한국학교 교장에 취임한 사실을 밝히고 앞으로의 수업방향을 설명한 후 후원을 요청하여 컴퓨터 6대를 지원 받았다. 김 교장이 다닌 회사는 병원관리 프로그램 판매에서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는 직원이 약 2천명에 달하는 메디컬 매니저 코퍼레이숀이다.

당시 이 회사의 사장이 하바드 대학을 나온 한인이었다. 그래서 김파울 교장의 열정에 더욱 감탄했다.

그는 말한다. “한국 민족은 비록 미국 땅에 살고 있지만 뿌리는 한국입니다. 이곳에서 태어난 2세들도 마찬가지예요.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한글학교의 임무는 한인 2세들에게 너희들은 한국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코리언 아메리칸으로서 세계화 시대에 우뚝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지요.”

미국에는 현재 1천여 개의 한국학교와 8천여 명의 교사 6만여 명의 학생들이 있다. 통계에 의하면 한글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미주 전체 한인 2세의 14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이처럼 낮은 비율은 특히 중고등 학생의 참여도가 낮기 때문이라고 김 교장은 지적했다.

“그래서 저는 2세교육은 교육자만의 책임이 아니라 한인사회 전체의 책임임을 통감하고 우리가 더욱 더 열심히 ‘2세 뿌리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 교육 때문에 미국에 왔다고 하시지만 사실 부모님들께서 자녀들에게 한국의 얼을 심어주는 일에 대해서는 소홀하신 것 같다”고 그는 부연했다.

이중언어를 하는 학생들이 사고력, 창의력, 상상력에서 단일 언어를 쓰는 학생들에 비해 뛰어난다. 따라서 학업에서 우수한 성취도를 보인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한국어까지 배운다면 먼 앞길에 더 나은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라고 강조한 그는 학교가 좋다 나쁘다 하는 시비를 떠나 부모들이 우리 2세가 한국어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역설했다.

“일부 부모님들은 우리 아이들을 한글학교에 보냈더니 별로 배운 게 없는 것 같더라 라고 말씀하시는 데 꼭 한국어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한국어를 잘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집에서 체계적으로 교육을 시킬 수만 있다면 더 효과적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현실 상 부모님들이 집에서 아이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부모들이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것이 보편적이니까요. 그래서 가능하면 아이들을 한글학교에 보내시는 것이 바람직합니다”라며 “저희 학교에서는 3세부터 고등학교 12학년까지 수준에 맞게 체계적으로 공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국어 배우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저희 학교의 경우 2, 3년만 계속 수업을 받으면 대화도 잘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금주 토요일 이임하지만 정말 훌륭한 새 교장 선생님이 오시게 되어서 기쁘다며 이렇게 호소했다. “미국이 다민족사회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민족의 문화보존과 정체성확립에 제일 중요한 요소가 되는 한국어 교육에 대해 부모님들께서 특별한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당부하고 싶어요.”

컴퓨터 교육에 큰 정열을 쏟는 한편 김 교장은 도서실 확충을 위한 노력에도 많은 정열을 쏟았다. 한국에 있는 여러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었다. 현재 도서실에는 교과서를 포함한 많은 서적이 구비되었다.

앞으로는 이 학교의 이사로서 학교의 발전을 위해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김파울 선생은 새해의 비전으로 학생 100명 목표, 한국과 청소년 학생들의 교류 및 문화 프로그램 교류, 그리고 수준 높은 교육의 달성을 들었다.

새해의 소망을 묻는 기자 질문에 결혼 3년째에 접어들고 있는 김파울 교장은 “우리 가정에도 새해에는 2세를 허락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며 “이것이야말로 저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당면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1988년 필리핀을 떠난 후 지금까지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없어 “나는 가족 사진을 찍을 기회가 없었다”고 기자에게 고백한 김 교장선생에게 금년에는 온 가족이 만나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기회가 오기를 기원해 본다. <349호 / 200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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