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렬 유럽여행 기행문 / 23회> 오스트리아

<김명렬 유럽여행 기행문 / 23회> 오스트리아

지난호에 이어서..

 

오스트리아는 대부분이 게르만족으로 이루어져있고, 체코슬라바키아,루마니아등 유럽계나 유태계등도 일부 있다. 공용어는 독일어이나 발음이 독특하여 표준 독일어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영어도 폭넓게 통용되고있다. 카톨릭은 오스트리아인 생활의 기본이 되고있으며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검소한 생활양식을 나타낸다. 오스트리아는 여러민족의 문화가 융합되어 독자적인 문화로 재 창조하였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과거 역사에 대한 자긍심이 매우 강하다. 특히 음악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와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를 배출해 내기도 했다.

국명이 ‘동쪽의 나라’라는 뜻의 ‘외스터라이히’에서 비롯하고 있는 오스트리아는 1278년 합스부르크왕가의 속령이 되었으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고, 강력한 절대주의 국가를 형성하여 중부유럽을 지배하였다. 다음은 너무나 아름답고 유명한 도시, 잘츠부르크에 대하여 소개하여드리도록 하겠다.

잘츠부르크 (Salzburg)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의 서부에있는 도시로 잘츠부르크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잘츠부르크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과 다양한 역사, 모차르트의 출생지, 그리고 알프스로의 관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의 역사를 보면 기원전 15년경 고대 로마인들에 의해 여러 정착지가 하나로 합쳐졌다. 700년경에는 도시의 로마 관구가 설치되었고 이후 바바리아를 관장하는 대 교구가 되었다. 당시 이 도시의 경제는 암염채굴을 통한 소금생산에 기반을 두었다. Salz는 소금을 뜻하는 독일어이며 따라서 잘츠부르크라는 이름은 ‘소금의 도시’를 의미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은 주변의 산에서 채굴한 소금을 수송하는 대 동맥의 역할을 했다. 최근 20세기 역사를보면 제2차 세계대전동안에 도시는 다행히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큰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비록 도시의 교량과 성당의 돔 일부가 파괴되었지만 바로크양식의 많은 건물들은 손상되지않았다. 그 결과 도시자체의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몇 안되는 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65년에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찰츠부르크와 잘츠부르크 연방주에서 촬영되었다. 이 영화는 잘츠부르크의 성당 수녀였던 마리아 폰 트립이 귀족 가문과 동반해 독일의 점령으로부터 탈출했던 실제의 이야기에 바탕을두고있다. 이 영화는 오스트리아인에게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촬영지를 방문함으로서 영화를 되새기기 위해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많이있다. 한편 이곳 잘츠부르크에서 1756년 1월27일 출생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나 자랐다. 그의 생가와 살던곳은 관광객들 사이에도 유명하다. 그의 가족은 구 도심의 작은 교회 뒷마당에 묻혔으며 도시에는 그를 기리는 많은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다음은 세계적인 대 음악가인 모차르트의 생애에 대한 간단한 소개 이야기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생애와 음악 ‘교향곡’ 이야기

음악의 기적적인 천재 모차르트(1756~1791)는 1756년 1월27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음악적인 재질은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올바른 음악교육을 통하여, 말과 함께 음악을, 글자와 함께 5선지에 음표를 그리면서 자랐다. 6세때 뮌헨과 빈으로 연주여행을 했으며, 여기서 성공을거두고 곧바로 아버지와 함께 파리,런던, 그리고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순회하면서 국제무대에 진출하여 뛰어난 음악재질을 선보여 ‘음악의 기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한편으로 작곡에서 타고난 천재성을 보였으며, 7세에 ‘바이올린 소나타’ 4편을 파리에서 출판을 했고, 12세때는 오스트리아 황제의 천거를 받아 빈에서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1773년 4년동안 세 차례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하여 이탈리아 음악의 특성을 공부했으며 당시 유럽

을 석권하고 있던 이탈리아 오페라의 밑거름을 체득했던 것이다. 17세때 다시 빈을 방문하여 23세 연상인 하이든과 교우를 시작하여 그의 음악인생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독일 기악음악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큰 도움을 얻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구직(求職)을 위하여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는데 당시 프랑스는 대 혁명을 앞둔때라 사회 전반이 격동기에 놓여있었으며 모차르트가 어린시절 이곳을 방문했을때와 같은 음악의 신동이라는 환호는 받을수가 없었다.

한편 이러한 어렵고 곤란을 겪던 시절, 모차르트는 음악의 천재 소년 베토벤을 만나게 된다.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활하던 1784년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도 만났다. 그는 어려운 집안사정에도 자신을 찾아온 베토벤을 반갑게 맞이하였는데, 이때 베토벤의 나이는 불과 14세였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자신의 곡을 즉흥적으로 또다른 작품으로 훌륭히 소화하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교육비를 일절 거절하고 베토벤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모차르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오스트리아 빈을 갑작스럽게 떠나갔다. 만나지 불과 한달만의 일로 이것이 두 거장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베토벤이 다시 빈에 찾아온것은 1792년으로 그때는 이미 모차르트가 죽은지 1년이 지난후였다).

모차르트가 프랑스를 여행하고 있을 때 모차르트 역시 그의 어머니가 별세하여 크나큰 충격을 받았으며, 한편으로 그가 희망하는 파리에서의 구직문제도 난관에 봉착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작곡가로서 창작에 열중하여 ‘파리교향곡’을 비롯한 20편의 명작을 작곡하였다. 당시의 유럽은 귀족과 교회가 지배하는 봉건사회였다. 따라서 음악가는 자신의 소신대로 예술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황실에 철저하게 봉사하는 신분이었으며,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음악가도 왕후 귀족과 교회를 떠나서는 생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모차르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 북부의 독일과 접경한 지역으로 카톨릭의 세력이 강대하여 로마교황이 임명하는 대주교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모차르트도 잘츠부르크의 궁정악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봉건적 환경에서 음악은 교회와 왕후, 귀족의 오락물로 존속했으며 자유시민을 청중으로 하는 음악활동은 불가능하였다.

천재란 본시 시대에 앞서는 감각의 소유자를 말한다. 서양의 봉건사회는 휴머니티가 근본적으로 억압당하여 시대에 앞서는 감각을 가진 사람을 이단시하였기 때문에 참된 인간적인 진실을 실천하는 천재가 아쉬웠다. 모차르트의 인간적인 자각은 25세때 비로서 움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매우 무모한 자유음악가의 길로 그를 몰아가게 했던 것이다. 당시 유럽의 자유음악가란 실직한 음악가에 불과한 존재였다. 그리하여 모차르트가 자초한 자유음악의 활동은 숱한 우여곡절로 상상을 초월하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종교와 귀족사회가 지배하는 냉혹한 환경에서 예술가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한 악전고투는 계속되었으나 끝내는 자유음악가의 의지를 살리지 못하고 가난과 신고(辛苦=가혹하고 고통스러운 삶)속에서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던 것이다. 모차르트의 작품 중에서 이른바 3대 오페라의 걸작을 위시하는 문제가 되는 교향곡의 거의 모두가 이 같은 뼈저린 힘들고 어려운 환경속에서 작곡되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가 기적적인 천재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사실이다.

모차르트 교향곡의 특징은 1)최초의 작품이 불과 8세에서 9세라는 어린 나이에 시작되어서 2)여행을 통해서 어린 소년기에 유럽 각지의 교향곡 형식과 직접 접촉하여 그 영향과 자극을 직접 겪은것이 원동력이라고 할수있다. 그리하여 음악에서 유래를 찾아볼수없는 다양성을 발견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41편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모차르트의 인생은 불행을 자초한 무모한 ‘자유음악의 길’ 예술가라고 할 수있다. 그러나 반면에 ‘인생은 심각하게 예술은 명랑하게, 음악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절대로 과격해서는 안된다’는 고전주의 작곡가로서의 신조를 뿌리깊게 실천하여 ‘음악의 기적’으로 세계인들의 영원한 사랑을 받고 있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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